니 감정이 중요하면 남의 감정도 소중하다
언젠가부터 한국은 감성팔이에 미쳐있다. 지역, 남녀, 세대, 계층간의 갈등으로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경연대회도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어야 상 받기도 쉽다. 팩트에 근거해서 이성적으로 말하면 역시 T는 사이코다, 정나미가 없다, 말을 이쁘게 안한다 같은 소릴 해댄다. 그러면서도 공식 석상에서 막말에 욕까지하는 사람에겐 시원하다, 멋지다고 옹호하는 모순을 보인다.
하나같이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울먹이고, 함 울어주면 힘내라는 응원이 쏟아지고, 꼬투리 하나 잡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마녀사냥하고, 싫으면 안보면 되는데 꾸역꾸역 찾아가서 악플달고, 죄를 지어도 인물이 반반하거나 내 편이면 무조건 지지해주고, 진리에 충실하기 보다는 교주에게 엎어지고, 소수와 약자는 늘 선하고 옳다고 여기는 등, 아무리 female, fashion, feeling의 3F시대라지만 도를 넘어선 감정 잔치때문에 논리적인 사람은 꼰대나 비정상인이 되어버렸다.
물론 사람이기에 감성, 감정을 배제하고 살기란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냉혈인간이라도 눈물과 웃음이라는 게 있다. 누구의 감정도 다치지 않는 선에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건 말처럼 이상적일 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입장이 제일 소중하기에 분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법과 질서가 있는 이유도 그 어지러움을 최소화하기 위함인데, 거기조차도 감정이 개입되니 혼란만 가중된다.
똑같이 사람을 죽였는데 누구는 신상을 공개하고 누구는 인권을 들먹이며 비공개한다. 음주상태, 정신상태를 보고 심신미약이라며 죄값이 달라지고, 뉘우치는 척하고 반성문과 탄원서를 제출하면 금방 출소할 수 있으며, 성희롱이라고 우기면 증거가 없어도 깜빵보낼 수도 있고,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면서도 차별금지법이란 미명 아래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권리는 과감히 묵살시키며 역차별하는 등, 법이 있어도 모호한 기준과 판사의 감정에 따라 형량도 고무줄처럼 줄었다 늘었다 한다. 사법부 뿐만 아니라 입법부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이 사심을 섞어서 법을 만든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감정이 공적인 곳에서까지 날뛰면 위험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증가한다.
만약 절도죄에 손모가지를 자른다는 법이 있고 이유불문하고 곧이곧대로 시행한다면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은 현저히 줄 것이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함무라비 법전대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선한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너무하다며 범죄자의 인권을 운운하는 사람도 꽤 된다. 그들은 자애로운 인간이 아니고 악을 더 퍼뜨리는 존재들이다. 피해자의 인권과 입장에는 아가리를 닫으면서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고 가증스럽게 행동한다. 앞뒤도 안맞고 분노도 감정도 선택적으로 하는 것이다.
자신이 현재 어떤 정신 상태를 가졌는지, 무슨 생각과 말을 하고 사는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스스로 관찰하며 사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소중한 감정과 감성과 느낌은 개인의 영역에서 잘 보듬어가고 키워가야 한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곳에 드러내는 순간 세상은 탁해진다. 저마다 다른 감정을 갖고 사는데 내 감정만 옳은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외롭고 상처받은 영혼을 아껴주는데 더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나를 억누르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니 집단 행동에 쉽게 동요되고 외부로부터의 인정을 갈망하게 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탁월하게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공감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높은 메타인지와 자기 객관화가 있기 때문이다.
광기는 언제나 그릇된 감정에서 만들어지고, 이성이 숨을 쉬면 광기는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