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는 구원이 없다

상선약수

by Norah

며칠 전 문득 뉴질랜드 라디오가 듣고 싶어졌다. 이십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잊고 지내던 채널 이름이 생각나서 검색해보니 아직도 그 방송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풍의 광고와 음악을 듣는데 웃음이 터졌고 옛날 생각이 났다.


스물 두 살의 나는 겉으로 보여지는 문제는 없었지만, 방황이 심했고 삶에 큰 변화가 필요해서 영어공부를 핑계 삼아 휴학을 하고 뉴질랜드로 떠났다. 말은 어학연수였지만 사실 현실도피나 마찬가지였다. 낯선 환경에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는 라디오를 종일 틀어놓은 채 한자 자격증 공부를 하고, 무릎이 아파서 하숙집 정원에 돌아다니는 벌을 잡아서 침을 놓고 온 몸이 다 뒤집어져서 아줌마를 놀래킨 또라이. 날 좋아해주는 친구들도 많았고, 하이클래스에도 빨리 들어갔고, 잘 놀았고, 여행도 많이 다녔지만, 그 때 나는 그 상황을 온전하게 즐기지 못했다. 대자연의 절경에도 와! 이 말 한 마디만 내뱉을 정도로 마음은 한국처럼 삭막했다. 하루에 네 시간을 걷고 매일 일기를 한가득 써 봐도 마음이 쉽게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환경이 크게 변해도 내 마음이 같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과 진정한 혁명은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나는 역마살도 없는데 여전히 몇 년째 국내외에 번갈아 살면서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닌다. 그런데 이제는 옛날의 그 마음 상태가 아니라서, 봤던 걸 또 보고 했던 걸 또 하게 되어도 그 때마다 새롭고, 고맙고, 즐거우며, 때와 장소와 상황에 맞는 행동을 찡그림없이 할 정도로 마음이 말랑해졌다. 맞고 틀림을 따지는 것과 호불호도 자유를 방해한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도 오면 오고 가면 가는대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생기면 생기는대로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뭔가가 싫어서 회피한다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단 뜻이고 그건 자연스런 일이 아니라서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냥 물 흐르듯 사는 것이 제일 속 편한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끔은 국내외 정세가 심각해보여서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피하려고 용을 쓴들 조금 덜 불편하거나 더 늦게 죽을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그저 지켜보면서 그 속에서도 유쾌한 일을 찾아서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랑을 만나면 신나게 달리다가, 제방을 만나면 잠시 멈추고, 바다를 만나면 고요해지는 물. 물이야말로 자유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탈레스의 말대로 물은 만물의 근원이고 노자가 상선약수를 강조한 이유도 알 것 같다. 사주적으로도 물은 지혜를 상징하고 물 없는 팔자는 답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나는 사주 일간도 물이다. 물로 태어났는데 돌이켜보면 물처럼 산 적이 별로 없다. 지금까지 사자처럼 살다가 아이가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치만 괜찮다. 나는 매일 나를 새롭게 쓰고 있고 속도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선한 아침, 오늘도 자유롭게 출렁거려봐야겠다. 나는 오만 곳을 다 헤집고 흘러가는 맑고 깨끗한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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