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추대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모임을 창설했을 때 그것을 뿌리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인도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추종자를 거부하며 동방성단을 해체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단체란 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소속감에서 생기고, 거기에서 권력이 시작되며 권력은 진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리는 곧 자유이고 자유가 아닌 것은 모두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다라는 것을 아주 높게 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앎에서 틀이 나오고 틀은 우리 스스로를 옭죄고 있다는 사실은 지나쳐버린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환경만이 그 이유인양 갑갑함을 느낀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내 삶이 진리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인생은 앎의 축적이 아닌 지속적인 수행을 필요로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갖고 있는 책을 다 갖다 버려도 좋을만큼 사유하기에 좋은 혁명적인 책.
<좋은 문구 발췌> -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문구의 연속이다
모든 길은 진리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리는 길을 갖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점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진리는 살아 있다. 죽은 것은 그것이 정적이기 때문에 길을 갖고 있지만 진리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서 쉴 곳이 없다. 어떤 절이나 교회에도 없으며 어느 종교나 선생 철학자 그 누구도 당신을 진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은 이 살아 있는 것이 다름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오랜 세월 우리는 선생들에 의해 권위자들에 의해 책과 성인들에 의해 마치 숟가락으로 떠먹여지듯 양육되었다.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자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으며 바로 이 점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미숙함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우리 각자는 모든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은 우리가 지닌 삶의 공격성 그리고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편견과 관념으로 인해 발발하기 때문이다.
왜 외로움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기 때문이며 자신이 공허하고 무디고 바보스럽고 추하고 죄스럽고 불안하다는 사실 즉 왜소하고 겉을 꾸미고 들은 풍월로 사는 존재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직시하라.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라 도망치는 순간 두려움은 시작된다.
기쁨은 즉각적인 것인데 당신이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쾌락이 된다. 현재에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며 그것에서 쾌락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기쁨이 된다.
생각이란 언제나 낡은 것인데 그 이유는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고 기억은 언제나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해본다는 것은 없으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없다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왜 나는 의존하는가. 왜냐하면 나 자신 안에서 나는 깊이가 없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 자신 안에 항상 넘치고 풍부하고 활력 있고 움직이며 살아 있는 원천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의존한다.
비교가 있으면 갈등이 있는데 이 비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과의 비교를 말하며 따라서 있었던 것과 있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게 된다. 아무 비교가 없을 때에만 있는 것이 있으며 있는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은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요구는 이중성에서 나온다. 나는 불행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바로 그 요구 속에 불행이 있다 .착해지려고 노력할 때 바로 그 선인 그것이 반대인 악인 것이다.
명상은 놀랄 정도로 기민한 마음을 요구한다. 즉 명상은 삶의 전체성 -그 속에서는 모든 단편화가 중지된다-에 대한 이해이다. 명상은 생각의 통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통제될 때 그것은 마음속에 갈등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의 구조와 근원을 이해할 때 생각은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모든 생각과 감정을 느껴 아는 것이며 옳다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다만 생각과 느낌을 바라보고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관찰 속에서 당신은 생각과 느낌의 모든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해로부터 침묵이 나온다. 생각을 짜맞추는 데서 오는 침묵은 정체이고 죽음이지만 생각이 그것 자체의 처음을 이해하고 그 자체의 본질을 알고 모든 생각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고 항상 낡은 것인가를 이해했을 때 오는 침묵은 명상이다. 이 명상 속에는 명상자가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그것의 과거를 비웠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마음은 종교를 믿는 마음과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신은 종교적이지 못하면서도 힌두교도 기독교나 불교도일 수 있다. 종교적인 마음은 전혀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으며 아무 신앙도 없는 상태이다. 다만 그냥 있는 것 참으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