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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자유리 Mar 29. 2018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열세번째 방법

또라이는 당당하게 교양을 공부하지 않고 즐긴다.




# 또라이는 당당하게 교양을 즐긴다.




여러분은 평소에 교양을 얼마나 즐기십니까? 

교양은 왠지 사치있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전유물로 바라보시지는 않은가요?


저 역시 교양의 힘을 알기전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어쩌다 책을 읽으려고 서점에 가면 저는 당연히 베스트셀러를 골랐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당연히' 라는 것이죠. 문학은 정말 왜 읽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철학은 뭣하러 하는지, 과학은 너무 어려웠고, 신학은 종교를 믿는 소수의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술은 정말 딴 나라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것을 왜 하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양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교양을 하는 것을 보며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딴 나라의 사람처럼 낯설게 바라보았죠. 아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는 제 기분을 이해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박물관을 가도 아무런 영감이 없었습니다. 미술관에 가면 설명서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론 클래식을 들으러가면 졸리는 표정을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가격이 왜 이렇게 비싼 건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구요. 노랫소리가 수면제처럼 들리다보니, 그냥 누워서 쉬다 오기 바뻤습니다. 



한번은 미술관에 꽁짜표가 생겨서 가본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어떤 미술작품을 한참 바라보는데, 도대체 뭘 그린 건지를 모르겠더군요. 그냥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습니다. 서로의 작품 배경을 이야기하며, 교양을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재수없네. 그래 니네 잘났다.” 


저는 마치 이 예술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척 다양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꿀리기 싫었습니다. 저는 턱밑에 손을 갖다대고 생각에 잠긴척을 했습니다. 깊이 사색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머리속에는 온통 집에 빨리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때 이후로 전 몇년간 미술관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겼던 것 같아요. 뭘 하는 척을 하기 싫은 기분. 이해 하시나요?



# 사라진 공룡



우리는 말이죠. 생각보다 교양을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바로크 미술이 무엇인지 알아야 바로크 미술을 이해할 수 있다고생각하는 것이죠. 생각해보면, 제가 미술관에 가기 싫었던 이유도 그 권위에 대한 복종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시대의 무슨 과정이 정답이 되는 것 마냥 붙어 있는 해석들과 순서에 맞게 봐야하는 그 흐름이 저는 너무 싫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말이죠. 유년시기에 저는 미술관 가는 것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친구들과 함께 과천에 있는 미술관을 찾아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미술관이 공짜라는 것도 좋았습니다. 언제든 찾아가서 마음껏 미술품을 보고 집에 왔습니다. 미술관을 걸어가는 길에 곳곳에 놓여있는 청동물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새의 모습을 하는 인간의 얼굴을 보며,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관리인 몰래 얼굴을 쓰담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백남준의 많은 작품들을 보고 왔었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생생하게 나요. 티비가 쌓여 있는데, 그 모습이 거대한 한 마리의 공룡처럼 보였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뭐니 이런 설명판에 적힌 글자는 제게 그냥 라면에 적힌 유통기한 같았습니다. 공룡을 보느라 쳐다 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티비를 쌓아놓은 그 모습이 그냥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 공룡을 한참을 쳐 다 보았습니다. 때론 공룡이 포효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저를 무섭게 쳐다보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그 공룡이 싫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방출되는 티비의 수신호가 공룡의 포효가 되기도 하고, 미소가 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마냥 신기하게 그의 울음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과천의 미술관을 가지 않았습니다. 가지 못할 이유가 많이 생기더군요. 친구들과 시간이 중요했고, 공부도 해야하고, 거리도 멀었기에, 정말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저는 그렇게 예술과 멀어져 갔습니다. 25살이 되어서 몇년만에 찾아간 미술관에는 이제 더 이상의 공룡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벨라스케스, 조토, 얀반에이크의 작품은 멋지게 걸려있었지만, 제 눈 앞에 공룡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공룡의 웃음도 공룡의 춤사위도 끝나버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미술의 권위 앞에서 작아진 너무나도 작아진 영혼이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술관을 가지 않았습니다.



# 쫄지마. 씨팔.


인문학을 왜 하세요?



하루에도 몇번씩 물어보는 사람들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요. 인문학을 저는 왜 업으로 할까요? 이걸 왜 해야 할까요? 

돈도 되지 않는 이것을 왜 해야 할까요? 

살기위해 저는 책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런거 읽는게 네 인생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 거 같니? 그런게 돈이 되냐?"



 수도 없이 날카로운 질문을 담아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잘난 거 하나 없는 사람이었으니깐요. 집이 부유하지도 않았고, 타고난 재능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고, 말을 엄청 잘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아 보였습니다.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매일 일이 끝나고 오면 집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하루에 1권을 읽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하게 읽은 책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급하게 다 증발되더군요. 잘못된 독서법도 엄청나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렇게 책을 읽어갔습니다. 말을 잘하고 싶어서 인문학 토론회가 있으면 무조건 참여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책의 내용을 곱씹어 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토론회를 주최해보고 싶었습니다.



 주변 지인들을 초대해서 1년 정도 토론을 운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좋은 질문을 드리기위해 만들었던 노트가 집에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이걸론 돈 한푼 벌지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성장 하나만을 믿고 끊임없이 밀고 나갔습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대화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자 만의 애환을 날려버리기위해서, 제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전부이었습니다. 산 사람들은 저를 이해해주기 어려웠거든요. 때로는 샤르트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의 카운셀러가 되주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노자는 항상 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조력자이었습니다. 그렇게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을 읽혀나갔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니, 내 안의 폭발이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문득 새벽에 책을 혼자 읽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면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 혼자 괴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참 웃기죠? 혼자 잠옷바람에 집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만세를 부르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지금 생각해봐도 참 아련해지네요. 너무나도 외로웠지만,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이 저를 담금질 해주었습니다. 지금 저를 보는 분들은 제가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인다고 이야기하십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저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었거든요. 



시장에서 잘 되는 것이라고 알려지면, 개때처럼 달려가는 무리들이 있지 않습니까? 맹목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눈빛이 변하는 저는 그런 부류의 그저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책을 읽다가 너무 이해가 안되어서 책을 찢어버린 적도 있습니다. 눈물이 왈칵 나더군요. 15번을 반복해서 읽는데 1쪽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저는 이 의미없는 행동을 통해서 한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매장에서 울려퍼진 클래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분명 매일 똑같이 나오는 클래식이었습니다. 대단한 노래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클래식의 노래제목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의 클래식을 저는 잊을수가 없습니다. 클래식의 아름다운 선율이 제 심장의 구석구석을 춤추게 했습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가슴이 울려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왈칵 흘렸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이 따뜻해 보였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물씬 풍겨나고, 이 세상이 정말 아름다워보이더군요.




 그때 이후로 저는 인생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문득 그림이 그려지고 싶을때가 생겼습니다. 도화지에 마구 그린 그림에도 감탄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낯설어지니깐, 더 이상의 굴레는 저에게 어떠한 억압을 주지 않았습니다. 길을 지나가다 보이는 도시의 인공 조형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제 그 일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되어 갔습니다. 이제 어디를 가도 그곳은 저에게 자유로운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걱정을 하는 시간에 저는 자유를 몸짓으로 표현하고 있고, 세상의 권위자들을 비판하기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을 전하고 싶은 저를 발견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문학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양을 공부합니다. 모르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알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이제 저는 잘 압니다.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무언가를 바라지않는 제가 되는 중심에 인문학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 권위에 굴복하지 마라.



쫄지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 있어도 나에게 영감이 없으면 “뭐 별것도 아닌거네” 이럴 줄 알아야 합니다. 권위는 사람을 위축되게 합니다. 작아진 자아는 탄성력이 없다면, 다시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응원하면서도 속으로는 비난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탄성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냥 부러우면 부러운거고, 싫으면 싫은 겁니다. 솔직함은 그런 탄성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떤 CF의 장면이 생각나네요. 한 커플이 들어옵니다. 세련된 옷을 잘 차려입고 들어온 커플 앞에 하나의 못이 박혀있습니다. 여성이 이야기합니다. “이 작품은 못 하나를 박아버린 현 시대의 아픔을 잘 드러내고 있어요. 못 하나만 봐도 그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요?”

남자는 이야기합니다. “진짜 대단한 작품인거 같네요.” 이때 박물관의 직원이 뭔가를 들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못에 그것을 걸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진짜 작품이 걸린것이죠. 두 남녀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창피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채 급하게 미술관을 나가버립니다.  



저는 이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자는 이미 작품을 본것입니다. 창피할 것이 아닌것이죠. 못이 작품으로 느껴졌다면 작품이 걸려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두 남녀는 진짜라 불리는 작품이 걸리고나서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창피했던 거죠. 권위에 위축된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창피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 작품 한번 보세요. 이거 보고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이게 모네의 작품이고,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니, 이런 것 보다. “흐리멍텅해 보이는데, 뭔가 아련해보이는 구나.”

이렇게 먼저 내가 느껴보고, 궁금해지면 해석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어두운 그림채가 별로다” 이러고 지나가셔도 무방합니다. (미술계에서는 굉장히 싫어하겠지만요.)



여러분이 미술관에 가면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해보세요 


“뭐 이딴 그림을 그리냐? 난 하나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으면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게 무식한것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옆에 걸린 배경지식이 필요하면 읽어보세요. 그렇지만 굳이 궁금하지 않는데 그것을 애써 읽고 적용하려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요즘 미술관을 자주 찾습니다. 당연히 공룡을 보기위해서입니다. 이제 제 주변에는 다시 공룡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니요 이제는 공룡도 보이고 비행기도 있고, 춤추는 여자도 보입니다. 그들이 미술관에 들어오면 저에게 인사를 하느라 바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애정가득한 몸짓을 표출하며, 어떻게든 우리와 소통하려고 합니다. 그냥 제 식대로 보려고 미술관에 갑니다. 작품이 이해가 안되고, 별로이면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오래 서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게 왜 대단해 난 잘 모르겠다.” 그게 설사 피카소인지 고흐인지 마네인지간에 쫄지말아야 합니다. 쫄아야 할 것은 작품을 모르는 우리의 눈이 아니고, 작품을 아는 척하는 나의 태도입니다.

우린 그렇게 권위 앞에 당당하게 예술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술가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첫단계 입니다.






#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열세번째 미션 : 책 안읽는 독서토론 (부글부글 북클럽)




그런 맥락에서 드립니다. 책을 좋아하면 책을 읽으세요. 하지만 억지로 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책을 읽어야 토론에 나간다는 생각도 하나의 틀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독서클럽은 그래서 책을 자유롭게 선택에 맡깁니다. 책을 읽어오면 좋습니다. 하지만 책을 안읽어도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람이 다 책입니다. 토론에 오는 사람들은 전부 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냥 부담없이 참여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관점을 나눠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으로 더 많은 기회를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토론이 끝나고 관심이 더 가는 책이있다면 알아서 스스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읽은 책은 남이 시켜서 읽은 100권의 책보다 나를 더 바꿀 수 있게 합니다. 한권의 책이 사람의 삶을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잠시 바꾸는 척을 하죠. 결국 지속적인 독서의 환경 혹은 책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환경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어려운 책을 읽어야 세상이 바뀌어 보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도 틀 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내가 관심이 없다면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직관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토론에 가서도 유심있게 지켜보세요. 책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 사람이 니체인척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보통 행동을 수반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업을 하거나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의 말만 믿습니다. 또한 억지로 독서를 강요하는 곳은 비추합니다. 거기에 가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해요.오히려 인문학의 편견이 커지기 쉽습니다. 그저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토론장이 더 좋습니다. 더 열려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깐요.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독서토론 모임을 만들어봐도 좋습니다. 그러면 자유롭지는 않게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이 생겨서 내가 가장 얻는게 많게 될 것입니다. 좋은 질문을 고민하게 되고, 좋은 책을 선정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교양을 쌓으면, 그 힘은 정말 대단합니다. 나중에 교양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은 같습니디. 권위에 도전하는 훈련을 교양을 통해 시도해보시길 바랍니다. 그게 여러분의 자유도를 올리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삶의 기복이 심한 당신이라면, 매일이 지치기만하는 당신이라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http://bit.ly/바나나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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