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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자유리 Apr 01. 2018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열네번째 방법.

또라이는 자발적 행동을 한다.



# 자유는 자발적 행동에서 온다.


인간은 지적활동을 통해서 자아를 발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이성과 감성으로 나누어졌다고 믿었습니다.이성은 감성을 통제한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실현은 사고적 행위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인격의 실현, 감정의 가능성과 이성의 사고력이 동반할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일치할때 발생하는 실현력. 그게 바로 '자발성의 실현'입니다.


# 자발성의 실현이란 무엇인가?


자발성의 문제는 자동인형처럼 사회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강제적인 억압이나 압박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자유 의지'를 의미합니다. 자발성의 실현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일부 보여주는 사례가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감정을 느낄 줄 알고, 사고 할줄 아는 자발성의 실현자 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예술가입니다. 저는 언제나 사업이 아니라 예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스스로 자발성을 실현할 줄아는 그들에게 사회는 냉소적인 시각을 유지합니다. 성공한 예술가는 정치인이 되지만, 실패한 예술가는 범죄인이 되는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 인간이 자발적 활동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인간의 자발적 활동을 느끼는 시기가 순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그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때, 사회에 틀이 깨져나가는 경험을 할때, 고민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때,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때 이런 경우에 우리는 잠시나마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사회는 이것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교한 사회 시스템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기위한 스스로의 수단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나의 수단화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좋은 차를 사야 된다면서 왜 사야한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나의 수단화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내가 자아실현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나의 수단화를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위해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합니다.


# 수단화로부터의 탈출.


탈출과 해방은 소극적 자유입니다. 이것은 진정한의미의 자유가 아니고. 반복적이고, 도피로의 자유입니다. 내가 사회로부터 수단화 될 수 있는 길로부터  탈출하는 두 가지의 방법은 진정한의미의 사랑과 노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피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자발적 행위자라는 것을 순수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그 사람이 되려고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이 순수하게 하나가 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노동도 마찬가지 입니다. 귀속적인 노동은 자유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창조의 노동만이  당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억압되고 착취되는 노동과 무엇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항의 노동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오직 숭고한 노동은 창조의 과정에서만 발현됩니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창조에 대한 과정에 대해서높은 평가를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의 결과에 집착합니다. 창조가 발생하는 순간에 감사하는 힘을 잃어버리기 쉽죠.하지만 당신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물질적인 결과가 아니라, 창조가 실현되는 과정속에 있습니다. 

# 진짜와 가짜가 혼동되는 세상.         

   

진정한 사랑과 창조적 노동은 나의 자유를 지키는 보석입니다. 여러분은 무력감과 불행함이 어디에서 부터 오시는 줄 아나요? 모든 무력감과 불행함은 진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옵니다. 인간은 자신이 표현할줄 모르기에 가짜감정을 표현하는 반증의 결과가 무력감과 불행감입니다. 우리는 진짜감정과 가짜 감정에 혼돈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를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 불친절함이 된다는 사회적 압박에 우리는 순응하며 살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정부에게로 정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로 이동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양보의 권위에 순응하며, 나의 자유가 갉아먹는 결과를 무지하고 있습니다.




# 교육이 하는 무서운 행동.



어린아이가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억압과 윽박을 통해 자신의 감정표출을 통제하다가 결국에는 감정표현을 포기하는 교육을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정이 소모적인 가치라고 가르칩니다. 마치 새로운 진리가 지정된것처럼 해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환경속에서 자신의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들에게 어떠한 자유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에서 보는 미디어 속에는 비장한 세월호의 슬픔 직후, 계약된 거대한 광고가 방송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다, 즉각적으로 바뀐 화면 속, 즐겁게 웃는 연예인들의 엔터테이먼트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봅니다. 미디어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치 폭격기 처럼 사고의 과정을 빼앗습니다. 이런 과정에 우리는 무감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학습됩니다. 감정이 없으면 어떤 창조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심리적, 감정이 메마른 사회는 그렇게 사람을 수단화하고, 기계화 하고 있습니다.교육은 수단화된 인간을 최고의 목표로 두는 것처럼, 인간의 감성적이고, 심리적 행동을 억제하면서, 스스로가 표출한 목표 속에서 인간의 자발적행위를 지속적으로 억압합니다. 



# 사고는 사실을 판단하는 도구가 아니다.


우리는 정보를 체득하고 그것을 해석하는데  내가 가진 모든 사고력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용이하게 인간을 평가하기위한 현대사회의 발명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욕망 하듯이 우리의 사고도 욕망의 일부입니다. 진리는 결국 사고의 결과입니다. 사고는 물질의 가치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욕망의 표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표출하고, 사회에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익숙해야합니다. 사회는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합니다. 복잡한 문제이기에, 대중이 알아야 할 영역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회에도 본질은 단순한 법입니다. 이런 사회의 소식은 우리사회가 나를 수단화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작은 실예가 될 뿐입니다.



# 죽음을 무시하는 사회


개성화가 무시되는 사회에는 인간의 개별적 죽음에 대해 집중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치열했고 깊었던 삶은 전쟁사망자로 대체되기 쉽습니다.현대에서 나의 죽음은 신문속 사망자00명으로 기재되기 쉽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무시는 인간의 공허함을 유발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죽습니다.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고통과 죽음은 결코 피할수 없는 삶의 동력이며, 인간관계의 토대를 제공하며. 기쁨과 열정의 강도와 깊이를 선사하는 경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신격화하여 인간의 삶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정의와 도전의 새로운 정의로 죽음을 정의합니다. 그리스에서는 삶을 중시하였기에 죽음에 대하여 경시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삶의 활력을 가진 권력자의 불멸을 기원하며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 독창성과 자발적행위를 사수해라.


인간의 독창성의 손실은 인간의 소망, 사랑과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나의 독창성과 자발적행위를

목숨걸고 사수해야 합니다. 인간의 수단화와 사고의 사실화, 개별적 죽음의 손실속에서 '나'의 자아를 생존할 수 있는 자발적행위를 해야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같은 주장을 합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행동을 해라."


언제나 강력하게 주장해요. 당신의 자유는 당신이 지켜야 한다고 말이죠. 당신에게 가치있는 것을 찾기위해 노력해야합니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은 자기가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의 잠언은 괜히 2000년을 살아온 정신이 아닌것이죠. 현대인은 스스로를 안다고 자부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강하게 의심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나는 이것을 진정으로 원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관찰해보세요.

그들은 스스로가 이것을 원하다고 하면서, 스스로가 이것을 왜 원하는지는 깊게 성찰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은 스스로가 무엇을 결정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 여러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열네번째 미션 : 로고테라피



여러분이 자발성을 얻기 원한다면, 해야 할 미션이 있습니다. 바로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이 것은 혼자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션을 위해서는 최소 6명 이상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로고테라피는 방법이 간단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희망하는 욕망을 적어봅니다. 이때 그 욕망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최근 어떤 일이 있는지 약 3분간 서술을 합니다. 이때 옆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꼼꼼하게 적어줍니다. 


로고테라피를 할때는 상대방이 어떤 단어와 가치를 많이 이야기를 하는지 잘 관찰해줘야합니다. 그리고 질문이 중요합니다. "정말 그걸 원하는게맞으세요? 혹은 이렇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이러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이렇게 단어하나를 끊임없이 물어봐줘야 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새 본인이 희망하는 것이 정말 스스로의 욕구로부터 나왔는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서 원하는 것인지가 조금은 구분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로고테라피를 통해 스스로의 욕망을 확인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둘 다 저 입니다. 동일 인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정말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것 모두가 '나' 입니다.







삶의 기복이 심한 당신이라면, 매일이 지치기만하는 당신이라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http://bit.ly/바나나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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