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자유리 Apr 26. 2018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19번째 방법

또라이는 유,무를 구분하지 않는다.

본질을 무시하는 자가 진짜 자유롭다.



# 또라이는 본질을 보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뤄주며

길고 짦음은 서로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이것이 세계의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노자 도덕경 중 





도덕경 제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노자의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노자가 우리에게 남들과 다른 길을 가라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노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본질은 없다.





제가 제일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인문학을 하는 분이니깐, 본질을 잘 보실것 같아요. 





유명한 매체의 몇몇 강연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본질을 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 




물론 비지니스 사업관계라던가, 나에 대한 생각을 하는 면에서도 본질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 본질이라는것이 정작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를때가 많습니다. 공부를 하고 세상을 알아가면 갈수록 더 모르겠더군요. 다만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된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것에 본질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죠. 




사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자연의 본질은 무엇이구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제 옆에 지나가는 반려견이 이 질문을 듣고, 인간을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물론 저의 심정이 반영된 농입니다만, 만약 제 반려견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이라는 종자는 참으로 독특하다. 뭔놈의 자연의 본질을 고민하느라. 자기 밥도 제때 안챙겨먹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자들..




오히려 저는 본질을 보려는 제가 가진 태도에 대해서 굉장히 경계하며 사는 사람중에 한명입니다. 저는 수업중에 사람을 만날때 항상 속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 사람이 살아온 삶의 무늬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주름의 깊이는 함부로 내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함부로 판단하려 하지말자.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바라보자.





우리는 본질이 정말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본질을 잘 보는 사람을 우리는 현인, 혹은 대학자 라는 명분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정작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많은 표상에 대해서는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어떤 젊은 청년을 만나야 한다고 가정해봅니다. 이때 그 친구가 평소보다 더 심하게 찢어진 청바지와 노란 머리, 귀걸이와 반지를 끼고 저를 만나러 왔다고 생각해볼게요. 저는 그 사람을 습관적으로 규정하고 본질이라는 명분으로 개념화 시키려는 사람이라면 저는 그 외면의 모습만을 보고, 그 청년을 내 입맛에 맛게 정의 내릴 것입니다. 이 한번의 ‘정의내림을 통해 어쩌면 저는 그 사람을 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정보저장 하는 것 처럼 말이죠. 





그러나 제가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함으로써 잃게 되는 것은 전혀 없을까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잠재력이나, 젊은 나이인 만큼 내재할 수 있는 다양성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본질의 태생은 개념을 규정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규정은 사람에게 명확한 선을 그으면서, 내 안에 강력한 개념화를 요구하게 되는것이죠. 그런데 생각해보자구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렇게 본질대로, 혹은 내가 예측한대로 돌아가는게 인생의 진짜 법칙이라 확신하십니까? 제 시각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삶은 비예측성, 비개념성, 비물질성, 유한성의 표본입니다. 제가 본질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개념화를 통해 내가 잃을 수 있는 것이 어쩌면 자연이 알려주는 모든 것 일수 있기 때문이죠.






불언지교" 하기.





본질을 규정하는 철학자로는 서양에는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히 서양세계의 사고 근간을 만들어준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크게 두가지의 근간이 있습니다. 바로 사유와 연장(extension)입니다. 사유는 일종의 생각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연장은 물질의 본질과 같은 것입니다. 본질을 바라보는 그의 사고는 서양철학에서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의 철학을 근간으로 한 서양문명의 영향속에서 그것을 습관화하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식으로 동양철학에는 공자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를 기억해보세요.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군주는 군주답게 라고 공자는 말합니다. 그 ‘답게’라 함이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물론 본질을 찾아 개념화를 하는 과정은 인간의 문명을 가능케한 중요한 습관인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있는 것이죠. 무언가를 규정한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의 어떤 틀을 규정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답게'를 맞추기 위해, 나의 “자연스러움을 외면하는 것이죠. 공자의 인위를 위해 자연이 주는 무위를 외면한다는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는 생각보다 인위"가 가득한 사회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층을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데요.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검사나 판사, 공기업, 공무원 같은 곳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엘리트의 기준이 사회의 소수 가치와 부합하는 집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결국 이 사회는 하나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경쟁이 엄청날 수 밖에 없죠. 그 가치만을 기준으로 살아가면 말이죠. 그 가치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내 안에 본질이 되고,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면, 그것이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또 다른 틀이 되어 가는 것이죠. 정말 슬프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육은 ‘언지교'가 아닌 ‘불언지교'를 해야 합니다. 불언지교란 규정하는 행위를 하지 않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교육하려 할 때, 어떤 말이나 개념을 통해 즉, 본질을 통해서 그 사람을 학습하려고 하는데요. 재밌는 사실은 학습의 행위가 발생할 때에도 세상은 가만히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개념은 멈춰서 있지만, 세상은 규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죠. 왜냐면 세상 자체가 비본질의 표본이니까요. 비본질의 세상을 본질로 가르친다는 것이 그런의미에서 과연 가당키나 할까요?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인이라는 이성적 가치와 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은 훨씬 이롭게 되고, 인의라는 가치를 버리면, 백성들은 모두 효성스럽고 인자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규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맞춰 통합하려 할수록, 우리가 잃고 있는 수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타인에 대한 관용과 인정은 규정하는 행위속에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타인의 다름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것, 그것은 인위가 아닌 자연이 주는 무위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 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세상을 유한한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본질이 아니라 타인의 관계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노자는 “무"라는 것이 무엇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무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유와 무는 반대의 개념으로 이해가 됩니다. 또 길고 짧음도, 높고 낮음도 반대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죠. 그러나 노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책상 앞에 컵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 컵이 올려 있는 이곳에서 “무"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어떤 비어있는 공간이 떠오르지 않나요?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공간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우리는 컵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요?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달리기를 뛰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에게 출발신호가 오고 그는 달리기를 뛰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에게 출발 그 자체는 ‘유’입니까? ‘무’입니까? 사실 출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사람의 멈춰있는 행동과 움직이는 행동만이 존재할 뿐이죠. 그러면 출발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결국 개념 짓는 것은 ‘유'이고, 아닌것은 ‘무'라고 단순하게 정의하지 않았으면 해요. 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어떤 비어있는 것이지만, 비어있다고 말할 수 없고, 언제든 채워질 가능성이 내포된 현묘한(노자의 표현대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노자에게 유는 무와 반대 개념이 아니고, 조화의 개념이 되는 것이죠. “유무상생” 이라고도 하죠. 유는 무가 있기에 존재가 가능하고, 무는 유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 그래서 “길다"는 “짧다"의 비교속에서 가능한 것이며, “어려움"은 “쉬움"이 있어야 이해가 되며 “낮음"은 “높음"이 있어서 알 수 있고, ‘음'은 ‘양'의 존재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노자의 사상에는 절대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행위가 아닌 다른 관계 속에서만 나의 우주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예쁘게 생긴 여성도 미스코리아 사이에서는 평범하게 되는 법이잖아요.








노자의 세계 속 “유와무"는 이렇게 서로 꽈배기처럼 꼬여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전체의 조화를 가리켜 노자는 이것을 ‘도’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도'는 유도 무도 아닌, 그 전체를 포괄하는 대립쌍의 꼬임이며,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무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닙니다.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가능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유는 무엇이 있음만을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언제든지 없을 수 있음을 내포하죠. 노자는 세상을 그 상생의 꼬임으로 보았고, 이것을 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노자의 말씀처럼 저는 우리가 미래를 살아가는 힘이 규정 짓는 행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규정하지 않는 가능의 영역 속에서 무한과 창의는 태동하게 될 것이니깐요. 그래서 우리 미래의 해답은 "본질의 규정이 아니라 관계와 흐름에서”,”개념의 정의가 아니라 현장의 사건에서", “예측가능한 법칙이 아니라 불가측한 혼돈 속에서 만 그 현묘함을 발견 할 수 있을것이라 예측해봅니다.






# 자유롭고 싶다면 지금 당장 본질을 버려라.




자유를 위해서라면 더더욱이 우리는 본질을 버려야만 합니다. 이 사실은 자연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주어진 어떤 곳에서도 본질을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모습 속에서만 우리는 다른 것을 규정하려고 하고, 본질을 돌아보려 할 뿐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있는 그대로, 어떠한 개념없이 우리를 바라볼 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연이 바람을 불어주는데, 강남은 더 불어주고, 강북은 덜 불어주고 하던가요? 자연은 가치중립의 표본 그 자체일 뿐입니다. 정작 그 속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규정짓고, 한정지을 뿐이죠. 







또 자연은 뭔가를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찬란하게 피는 봄꽃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흩뿌려지기 마련입니다. 여름의 풍성한 풀잎이 무수히 많아도, 가을은 매번 변함없이 찾아 옵니다. 가을의 풍성한 곡식도 겨울은 가혹할 만큼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모든 것 입니다. 그러나 지구상 생물중에 인간만이 자연이 주는 무위를 외면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존재보다는 소유에 집착하고, 삶의 유한을 이해하기 보다는 무한을 살 듯이 그렇게 자연의 원리를 파괴합니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망원경을 들고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인간은 정작 지금 밥먹는 시간을 놓치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우리는 그 망원경을 집어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자연을 규정하지 말고, 있는그대로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시인이라고 하며, 때론 광인이라고도 하죠. 그들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개념화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자연이 주는 모든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죠. 우리가 진짜 부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돈이 많은 부자만이 아니라 그런 광인이자 시인이며 철인이라고 생각해요. 





도덕경에서 노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모든것을 반대하며 외면하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무엇인가가 무조건 옳다고 믿는 욕망과 맹목적인 신념이 세상의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되는것을 경계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이상 때문에 파괴되는 나의 일상이 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경쟁보다는 선택이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 위 아래가 아닌 옆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는 사회, 작은 이상이 모여드는 사회, 규정이 아닌 인정의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렇게 나의 자유를 갉아먹고 있는 본질과 규정의 행위 따위는 당신의 자유를 위해 집어 던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연이 주는 있는 그대로의 ‘무위'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당신의 일상이 되기를 바랄게요. 오늘 초반부에 드렸던 노자의 메시지를 제가 전해 드린 이야기와 함께 한번 더 깊게 읽어보면서, 당신의 자유를 한번 더 사색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덕경 제2장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뤄주며

길고 짦음은 서로 비교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이것이 세계의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노자- 



당신의 자유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빛나는 하루를 살고 있는 순간랩 자유리가.





삶의 기복이 심한 당신이라면, 매일이 지치기만하는 당신이라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http://bit.ly/바나나프로젝트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18번째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