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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자유리 May 14. 2018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25번째 방법.

또라이는 야만적이다.





# 세상의 노예는 자유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조선시대의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사대부 소속의 높은 신분을 자랑하는 이 여성은 고귀한 취미생활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자수끝에 이런 메시지를 남겨 놓았습니다. 


"나는 정말 자유롭구나."


매일 움직이는 장소가 규제되고, 시간, 장소 별로 입어야 할 의류가 정해진, 결혼, 식사, 여행.. 등 그 어떠한 사생활도 없는 삶을 살아온 이 사대부의 여성이 스스로 고귀한 삶을 예찬하며, 자신의 자유를 노래하였다고 상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이 여성이 자유롭다고 느껴지시나요?







당연히 아니겠죠.


만약 말이죠.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16세기, 그 시대로 돌아가서 사대부 여성과의 삶을 바꿔 살아보면 어떻겠냐구 묻는다면, 십중팔구 대부분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말이죠. 우리 주변에는 조선시대 사대부 여성과 같이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자유롭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스스로가 자유롭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을겁니다. 자신이 진짜 자유롭고, 근거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는 너무 잘 살고 있는것 같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좋습니다. 스스로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한편으로 큰 착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는 말이죠. 순결이나 미덕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연성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말이죠. 내가 진짜 소유할때만 진짜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잃어버리기 시작하면 말이죠. 우린 그것에 대한 취미 또한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문명을 한번 맛보면, 다시 못돌아오는 원시인들처럼 말이죠.


결국 진정한 자유는 사회의 영역이 아닌 자연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사대부의 여성이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한 것 처럼 말이죠. 자유는 사회성을 띄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자연이 주는 그 자체의 전부입니다. 생명과 자유는 우리에게 동일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포기하게 되면 우리 삶은 실제로 죽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어떤가요?





돈이 많으면, 자유로워질거야.
1등석으로 여행을 갈 수 있다면, 나는 자유로운거야.
은퇴하고 나면, 자유로워 질거야.
내가 유명해진다면, 진짜 자유로워질거야. 





우린 어쩌면 말이죠. 사회가 원하는 상징과 체계에 갇혀서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자유성의 의미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사회성 가득한 자유는 언제나 그 의미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16세기의 자유와 21세기의 자유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자유는 말이죠. 노예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성이 짙어져버린 사람의 판단을 저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우리속에 갇힌 야수 한마리가 철장을 향해 머리를 쳐박는 광경속에서만 저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유는 그렇게 자연성을 잃지 않은 것에서 부터 유래되는 것입니다. 





# 문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가? 




현대인들은 말이죠. 많이 아픕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이 아픕니다. 그들은 애환에 젖어있고, 고통과 상처를 서로 숨긴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서나 웃을 없습니다. 메마른 사회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웃긴것은 그들은 그들이 진짜 아픈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싫어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희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사회는 힘들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이라는 백색마약을 주사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주사를 맞은 환자는 스스로가 위급한 환자인지 망각한 채 호흡기를 달며 버텨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희망이 결코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조금만 냉철하게 바라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말이죠. 사실 약속의 공간이자 가공의 사회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상징의 나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것에 목을 매며, 지정된 도덕적 관습과 규범에 맞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얼마전 강연장에서 들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돈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돈'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종이 지폐나 동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동전이나 지폐가 곧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생각한 것은 그저 화폐일뿐이고, 돈은 더 큰 개념을 나타내죠. 그런 점에서 화폐는 돈의 아주 일부분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큰 의미의 돈은 정말 무엇일까요? 조금 더 사색해보면 돈이라는 것은 사실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개념의 덩어리 일뿐입니다. 우리는 말이죠. 평소에 편의점에 가서 작은 카드를 내고, 물건을 얻어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플라스틱 카드를 통해서 원하는 물건을 받아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통장에 찍힌 숫자가 바뀌는 것이죠. 그저 사회가 규정한 숫자인 돈이라는 개념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약속일 뿐입니다.




여러분 학생은 무엇입니까? 학생하면 교복입은 청소년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런데 학생과 학생이 아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 경계를 조금 낯설게 바라보세요. 학생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나요? 우리는 사회 체제라는 명목성을 위해 '학생'이라는 상징과 지위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상징의 규범속에서 우리는 학교를 다니며 사회의 규칙을 다듬가는 것입니다이게 사회가 가진 상징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태생이 이런 상징을 가진 사회에서는 말이죠. 인간이 아니라 상징이 사회의 주인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미덕의 상징 즉, 사회가 희망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얻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됩니다. 성공은 정말 무엇을 의미하나요? 돈은 무엇이죠? 대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현대인은 스스로가 가진 상징속에서 굴종의 노예가 되어갑니다. 이제 그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문명은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일까요? 문명은 정말 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것일까요?






이 대답에 대해서 한 철학자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문명의 삶과 자연의 삶 중에서 어느 것이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되는지를 묻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삶을 한탄하는 사람들밖에 찾아볼 수 없으며,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자기 삶을 포기하려고 까지 한다. 그리고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합쳐도 이 무질서를 간신히 막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미개인이 일찍이 삶을 한탄하여 자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있는지 묻고싶다. 그런후에 좀더 겸허한 마음으로 어느쪽이 정말로 비참한가를 판단해보기를 바란다.".


 - 장자크 루소, 인간불평등의 기원론






우리는 끊임없이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스스로를 희생하고 헌신하며, 불안한 내 삶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아지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집 한채 마련해보려고 끊임없이 애를 쓰고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차가운 상징은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하루에도 수 천명이 자살을 선택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신문기사의 숫자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바라볼 뿐 입니다. 





신문기사를 보며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 현대인의 메마른 모습은 자신의 이야기 또한 사회의 차가운 상징 속에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집단의 죽음 속 개별적인 이야기는 배제되듯이, "강남역 화재, 15명 사망" 의 기사속에서 그 누구도 그들의 삶을 위로해주지 못합니다. 나의 아버지의 죽음이 숫자로 표명되는 상징의 세계속에서 개인이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야만성과 순수한 자유성은 서 있을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야만은 과연 무엇인가?



여러분은 야만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미개하고 야만한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스스로 문명인이 되어버린 한명의 인간은 자신의 야만성을 꼭꼭 숨기기에만 급급합니다. 지위와 운명, 재산과 정도, 정신이나 아름다움, 체력, 재주, 장점의 자질을 지닌 사람이 타인에게 존경받는 상징의 세계속에서 인간은 실제로 무엇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자질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실제의 자기와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야만이나 미개인이라는 개념은 보통 원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원시인들은 정말로 그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야만스럽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을까요? 





본래 자연속의 존재한 원시의 인간을 한번 상상해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들은 말이죠. 언제나 하늘에 별을 보며 감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말이죠. 사냥을 마친 저녁이 되면, 언제든 자신의 종족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눈 앞에 있는 사냥물에 온몸을 다해 몰입 할 줄 알았고, 언제든 벽에 벽화와 예술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할 줄 알았던 그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춤을 출 줄 알았고, 자연이 바라는 본래의 자연성을 잃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어떻습니까?  

현대인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쁜 일과 속 진짜 소중한 것들을 바라보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언제나 그들은 성과가 없는 자신을 불안해하며,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에 망상에 빠져 순간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예술은 사치적 행위이며, 소수의 전유물로 치부합니다. 그들은 안정만을 추구하다 도전하는 법조차 까먹었습니다. 그들은 '문명'이라는 지우개를 빌려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한 그 모든 위대한 그림을 지워가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무엇이 야만입니까?


내 삶에 솔직하게 사랑을 표현할 줄 아며, 자연과 소중한 것을 돌볼 줄 아는 미개한 삶이 야만입니까?

사회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상징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세련된 삶이 야만입니까?








#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저는 매일을 야만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성보다 직관을 중시하는 삶을 삽니다. 길을 잃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합니다. '좋다'는 수긍보다 '싫다'는 표출을 더 자주합니다. 누군가가 상징을 만들어놓으면 그것을 파괴하는 것을 더 좋아하며, 권위와 상징이 가득찬 존재 앞에서 저는 철장에 머리를 박아버리는 야수의 눈으로 그들을 응시합니다. 저는 세상의 사람들을 진짜 친구로 바라볼 수 있고, 집에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채 자주 온몸으로 춤을 춥니다.  저는 그렇게 자연이 선사한 내 안의 야만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와이프와 있었던 일입니다. 운전을 하던 중에, 사회생활로 많이 지친 아내에게 갑자기 부산으로 놀러가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날이 일요일 저녁이었고, 와이프는 당연하게 안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내일 회사를 가야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선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이게 정상이야. 자기가 이상한거지."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내에게 똑같은 질문을 네번 던졌습니다. 



"그게 정말 정상이야?" "회사를 규칙적으로 나가는 그것이 정상이야?" "매일 똑같은 시간에 회사를 꼬박꼬박 나가는게 그게 정말 정상이야?" "과연 정상은 뭘 의미해? 무엇을 위한 정상이야?"



아내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정상입니까? 매일을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프고, 내가 마음이 힘들면, 그 이상 무엇이 더 중요한가요? 그게 정상입니까? 아니면 힘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시기 바랍니다.



자연은 말이죠. 단 한번도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고 이야기한적이 없습니다. 가난해지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그저 내가 느끼며 살라고 간청할 뿐입니다. 여러분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야만인처럼 표현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자유는 본래 우리가 가진 자연성입니다. 조건이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즉, 이 세상에 자유롭지 못할 사람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연의 원리를 위배하며 불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삶은 그게 전부이니깐요.








삶의 기복이 심한 당신이라면, 매일이 지치기만하는 당신이라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http://bit.ly/바나나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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