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자유리 Sep 14. 2019

세상이 낯설게 보이는 만큼, 당신의 기준은 정해져있다.

때론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시작할때 한가지 꼭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어디에서부터 영향을 받은것인가?  

이거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이 원하는 기대는 아닌가?


사실 이게 가장 기본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당연한 결과만이 나올뿐이다.

이건 너무나도 명백해서 두번 이야기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참신한 결과를 원하는 이라면 무조건 두번 세번 생각 없이 조금은 낯선시점에서

문제를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기존의 질서 안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자리잡은지 오래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값진 결과는 간절하겠지만,

실상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어야 하는 창의적인 거리두기에 대해서는

그 낯설고 중심없는 과정에서는 우리는 심히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낯설게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 나의 삶 전체를 가꿔주는 중대한 일이 되어준다.


내가 무언가를 낯설게 바라본다는 일은 나의 인문적 시선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이건 비단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발끝으로 배운 경험과 머릿속으로 아는 지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거리가 훨씬 더 멀다.


‘나는 이해했다, 나는 이제 알것 같다.’


라는 단순한 느낌이 내 삶에 실제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뼈를 깍아내는 듯한 고통어린 시간이 필요한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낯설게 바라본다는 것, 즉  창의적인 거리두기를 한다는 것은 머리속으로 아는 지식의 나열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온몸으로 반응해서 얻어내야 하는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해있는 최고의 난이도가 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창의적이고 낯선 시선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경외한다.

경외감은 단순히 극찬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를 수반하는 감탄에 가까운 감정이다.




내 주변에는 실제로 창의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실패를 도전하고, 타인과는 다른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그들을 곁에서 만나면서, 나는 한가지 작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여기 이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a는 b이다.” 라는 막연한 명제를 가지고 이곳까지 온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이것들과 전혀 상관할 수 없는 수 만가지의 경험과 배움, 깨달음, 고통, 막막함, 풀리지 않는 난제를 겪으며

지금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재밌는 사실은 자신이 겪은 고통 그 자체가

그 무엇보다 깊고 클 수록 그 사람의 창의와 낯선거리는 더욱 커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는 단연코 한 개인의 연령과는 별개의 문제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것일뿐, 그것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명제가 아니었다.

시간은 확실히 주관적인 영역의 일이었다.

그 사람이 가진 도전과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 어린나이에도 충분히 깊이 있는 창의력이 발현 될 수 있었다.



철학자 푸코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통해 익숙함에 취한 현대인이 겪을 문제를 예견해주었다.


“이제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간의 투쟁 전선은 어떤 국경선이나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그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 싸움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일 수 밖에 없다. 권력은 가족, 학교, 대중매체, 감옥, 병원 등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집요하게 인간이란 생명체를 훈육시켜 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의 어느 부분이 권력의 노예로 길들여져 있는지, 그리고 아직도 권력에 포획되지 않은 나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것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 생명체로서 개체의 차원에서 볼때 어떻게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우리의 시대는 우리에게 막연한 자유를 주었다. 사실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볼필요가 있다.


나는 정말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얻고 있는 자유는 사실은 내가 일정부분을 시스템에 맡긴채, 얻어내고 있는 한계적인 것은 아닐까?

시대 안에서 나를 스쳐갔던 수 많은 교사들의 입밖에서 던져나온 찌꺼기들로부터 나는 나를 어떻게 방어할 수 있었는가?

나의 사상은 온전할까?

나는 온전히 내가 진짜 원함을 따라 살아가고 있을까?


냉철하게 말해서 우리는 자유를 얻은 것인지, 쾌락을 얻은 것인지 혼동이 올때가 많다.

공허하게 바라보는 스마트폰의 잡다학 지식을 보면서 허황된 쓴 웃음을 짓는 적이 많지 않은가?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깍아먹는 미디어의 프레임속에서 그들의 글을 빌려 내 입을 통해 이야기한적은 없는가?  

나는 나의 자유를 어떻게 보존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푸코의 철학은 현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깨달음을 준다.

낯설게 보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다름을 찾는 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무언의 권력을 나약한 개체가 깨야하는 생명의 용기를 수반하는 일인것이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우리 이제 쉽게 이야기하지 말자.


나는 나를 잘 알고 있고,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호언장담하지는 말자.

푸코의 지적처럼 스스로가 물들어가고 있는 익숙함을 당연함으로 여기지 않은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봐야 한다.  


당신이 진심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다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당신의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부터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이다.


“남자는 꼭 씩씩해야 할까?”

“결혼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가족은 가장 소중한 것일까?”


이 모든 행위는 여러분의 머리가 아닌 발끝에서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말로 안다 하지말고, 가슴으로 느끼고, 손발로 직접 체험하기를 바란다.

쉬운일은 아니겠지만, 이런 시도의 끝에서 여러분은 마침내 삶에 대한 자신만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기준은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다. 아니 가르쳐서도 안된다.

하지만 당신의 온전한 ‘기준’은 오직 익숙함으로부터 타협 하지 않을때, 보인다는 것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나도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외로움은 시작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