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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Jun 11. 2017

전역하는 꿈을 꿨다

전역하는 꿈을 꿨다. 헌병중대 애들하고 나는 간다, 인사를 했다. 경비소대 애들을 만나러 백차 타고 소대 앞으로 갔다.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소대 앞을 서성이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깼다. 많이 울다가 깼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전역을 하자면 아직 1년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들한테 연락이나 하며 살자고 말해야지. 어떻게 말해야 재치 있을까. 고마웠다고 말해야지. 실컷 장난치다 와야지. 꿈에서 나는 혼자 앉아 서럽게 울었다. 입대하는 것도 아니라 전역하는 꿈이라니, 어처구니없었다. 나는 부대에서 행복했었나보다. 오늘은 입대 이후 처음으로 다시 토익시험을 치러 가는 날이었다.

 

대학을 떠날 때 무언가 흐지부지 했었다. 돌아보면 중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함께하던 사람들과 언제라도 얼굴 보며 지내리라 믿었다. 가까웠으니까, 손만 뻗으면 닿으리라 생각했다. 사진만 잔뜩 찍어대면서 알지 못했다. 지나간 시절은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인사를 나누던 그 날이 정말로 우리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때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좀 더 열심히 그들과의 마지막을 살아냈을까?

 

토익. 이름은 지긋지긋한데, 고사장에 가서는 한껏 설렜다. 자주 지나던 안국동 골목이었으나 학교가 있다는 것은 오늘에야 알았다. 날이 맑은 덕에 교정에서 내려다보는 안국동의 풍경이 산뜻했다. 건물에 들어 교실에 이르니 복도 끝 넓은 창으로 환한 빛이 놓였다. 구석구석 놓인 한옥들과 기와지붕으로 구색을 맞춘 빌라들이 나직하게 보였다. 맑았다. 이 공간을 무심히 벽으로 막지 않은 누군가에게 고마웠다. 2학년 9반 복도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계단을 따라서는 노천명의 사슴이 걸렸다. 적잖은 졸업생들을 보냈다고, 시를 담은 액자는 해묵었다.

 

대학시절 막바지에 선배 하나가 가까운 타국으로 취직을 했다. 우리는 신촌에 모여 식사를 했고, 빨간 잠수경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다들 그랬을 테지만 섭섭하고 아쉬웠다. 유독 나는 그 마음이 온전히 드러나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잘 가라고, 한 번 안아보자고도 했다. 옆에 있던 동기는 아효, 아주 못 보는 곳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고, 유난스런 나를 놀렸다.

 

소대장을 하고 중대장을 하면서는 누군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그 때마다 빨간 잠수경 앞에서의 내가 떠올랐다. 좀 더 유쾌하게 보내는 것이 좋겠지. 내일 다시 만날 사람인 양 구는 것도 좋겠지. ‘고생했다. 다들 잘 살아라.’ 인사를 주고받았다. 허나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 모두 ‘연락할게. 밥 한 번 먹자.’ 라는 말은 주저했다. 모두가 아는 듯했다. 언젠가 서로 한번쯤 만나는 날이 오더라도 이렇게 모두가 모여 웃고 떠드는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리움에는 기한이 없으나 그리워할 자격에는 유효기간이 있는 듯하다. 토익성적처럼 말이다. 한 번 치르면 몇 년간은 자격을 주는 토익성적마냥, 한바탕 만나고 나야 얼마간은 마음 놓고 누군가를 그리워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 같다. 기한 지났다고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기한 내에 그리움을 표하지 않으면 자격을 잃고 말아 서럽다. 기한이란 어느 정도 주어지려나. 모르겠다. 그리움을 청하여 공허함이 남을 때, 아 나는 자격 잃은 그리움을 청하였구나, 그제야 아는 듯싶다.

 

며칠 전에는 동네 친구를 만났다. 각자가 먼 길을 돌아 마로니에공원으로 왔다. 만나서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친구는 여전히 회사 사람들과 스타크레프트를 한다고 했다. 중학교시절 내내 1:1 하자고 나를 골려먹더니 회사에서도 장을 먹는다 했다. 성대운동장 한 바퀴 돌아 아남아파트 가는 언덕까지 걸었다.

 

그 언덕에는 해묵은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교 때 서로 장난을 치다 내가 하늘색 가방으로 친구 코피를 터뜨렸던 곳이다. 한밤중이라 나는 내가 사고 친 줄도 모르고 누드빼빼로 하나 사먹으며 집으로 갔었다. 친구도 무언가 계속 물이 흘러서 팔로 훔치며 들어갔다고 했다. 친구가 집에 들어서는 장면은 몇 번 들어도 재밌다. 친구 어머니는 까무러쳤고 나도 어머니랑 놀라서 급히 귤 한 봉지 사들고 친구 집으로 갔었다. 또 한참을 웃다가 문득, 야 너 결혼식 사회는 나한테 맡겨라, 내가 그 날은 이렇게 말해야지. “제가 초등학교 때 신랑 코피를 터뜨렸던 사람인데, 오늘은 신혼여행 가시는 신부님한테 그 역할 양보하겠습니다.”

 

어지러이 헤매다 토익시험이 끝났다. 몇 년은 손 놓고 있었으면서 예전과 같으리라 기대한 것이 어리석었다. 두시 반에 모아 놓곤 시작까지 사십 분이 걸리더니 종료방송 땡 하니 흩어지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나는 혼자 멍하니 앉았다가 감독관 가시기에 같이 일어났다. 당분간은 안국동의 정취를 자주 맛볼 수 있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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