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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Nov 08. 2020

열차 여행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는 호사를 누리고 느지막이 회사로 간다. 주로 지하철을 탄다. 충무로에서 한 번, 다시 양재에서 한 번 갈아탄다. 평일 아침 출근길에는 대부분 서서 가지만 주말에는 그나마 앉아서 간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깨어있는 시간으로만 따지면 집보다 지하철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 판교는 멀지만 월세도 비싸다. 그래서 장거리 출퇴근을 택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씻고 자기 바쁘다. 어느 시인은 생업에 지쳐 집에 돌아온 뒤에도 하루에 밀물이 두 번 차오르듯 천천히 되살아나는 힘으로 시를 썼다는데, 나는 두 번째 밀물마저 회사에서 소진해버린다. 그러니 지하철에 보내는 시간이 그나마 내 시간이다. 언제든 내가 사는 순간들이니 내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을 구분하는 일이 우습지만, 마음이 그렇다. 나는 늘 내 시간이 부족하다.


  퇴근길에는 무언가를 하기 어렵다. 주로 막차를 타니 끔뻑 졸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남는 절반인 출근길에는 책을 읽거나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려 애쓴다. 딱히 집중해 읽는 책이나 적어내는 결과물이 있는 건 아니다. 좋았던 시집을 다시 읽거나 같은 문장을 반복해 적는 식이다. 그냥 애를 쓰는 게다. 무엇이든 붙잡으려 애를 쓴다. 짧게라도 그런 시간을 보내야 그나마 남은 하루를 웃으며 보낸다.


  그렇게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 보면 순간 페이지 위로 그림자들이 어지러이 살랑인다. 어서 여기 좀 보라고 손을 흔든다.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와 한강을 건널 때다. 페이지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열차 안은 바깥세상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으로 가득하다. 빠르게 지나치는 구조물들이 후루루룩 흔적을 남긴다. 한강이 보인다. 언제 보아도 멋지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나름의 정취가 있다. 매일 비슷한 장면이지만 의식적으로 보려 한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보려 멀리서부터 여행을 오지 않겠나, 생각하며 본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선배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삶의 한 순간을 이곳에서 보내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선배와는 몇 년 치의 먹고사는 이야기를 했다. 국밥 한 그릇으로 뜨끈히 내놓은 몇 마디는 오랜 시간 푹 고아 나온 이야기였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고민이라고 했다. 선배는 본인이 살아있는 것만으로 대견하다고 했다.


  열차는 다시 지하를 달린다. 어느 가수의 노래가 떠오른다. 많은 것을 준 생에 감사하다고, 지친 다리로도 도시와 물웅덩이를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어서 감사하다고 그녀는 노래했다. 자주 잊고 산다.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는 사실 말이다. 내가 멀고 먼 세월을 날아온 여행객이란 사실을, 이따금 누군가 손을 흔들어 일깨워주지만 금방 다시 잊고 만다. 너무 자주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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