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어로빈 Oct 28. 2022

아르바이트에서 하루만에 잘렸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좋아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4년전인 20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

  그 문자 메시지를 받은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떨떠름함이 느껴졌던 그 메시지는 아르바이트 첫 출근 오후, 토스트 가게 사장님으로부터 왔었다. 그날은 오전 9시에 출근해 토스트 가게의 업무를 속성으로 배웠다. 맛있는 토스트를 굽는 방법을 전수받았고, 열 가지가 넘는 토스트 레시피에 따라 재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익혔다. 8시간을 일한 뒤 집에 돌아와 밀린 학교 과제를 하고 있을 때, 휴대폰에 알람이 울렸다.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일부터 그만 나오세요.
오늘 일한 급여는 계좌 보내주시면 입금해드릴게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잘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잘린 이유를 물어보니, '일하는 방식이 안 맞네요.'라는 형식적인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일하면서 태웠던 두 개의 토스트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2.

  이번에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문자 메시지가 아니라 얼굴을 보며 오고 간 대화였다. 새로 시작한 영화관 매점 아르바이트에서 한 달가량 일했을 무렵이었다. 점장이 잠깐 따로 이야기하자고 나를 불러냈다. 당시 영화관은 한 달 수습 기간을 거쳐 6개월 장기 근무로 전환되는 구조였다.

"OO 씨, 아쉽지만 이번 달까지만 일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서비스직은 OO 씨랑 안 맞는 것 같아.
다른 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때도 나는 내가 장기 근무로 전환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항상 일찍 출근해 성실하게 일했고 근무시간 중에도 딴짓 한 번 한 적 없었고, 고객 응대랑 맡은 일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3.

  내 첫인상이 좋다고 호감을 보이며 다가왔던 그녀가 한 번의 만남 후 나에게 실망하고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의 1이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니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송금 표시가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차단을 당했다. 나는 갑자기 돌변한 태도로 잠수를 탄 그녀를 원망했다.



여기까지 읽으면 아마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니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비유하자면 나는 마치 한 대의 로봇이었다. 즉, 명령어(직접 지시를 받은 사항)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수행을 한다. 즉 출근 시간을 잘 지키는 것, 포스기를 조작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 "팝콘 좀 튀겨 주세요."라고 요청받은 내용 등에 대해서는 로봇이 그러하듯 잘 처리했다. 그렇지만 정말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문제였다.


마치 이런 느낌이랄까....


 

  그러나 나는 부끄럽게도 이러한 사건들을 모두 겪었음에도 그게 문제인지 몰랐다. 문제 인식 자체를 못하고 있으니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이야 그게 나의 부족했던 눈치, 즉 '사회적 지능'의 부족 때문이었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이 환경, 이 사람이 나랑 안 맞는가 보다 하고 넘겼었다. 나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도 했고,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부족하기도 했다.



  토스트 가게 아르바이트에서 잘렸을 때는 '사장이 인내심이 없네. 첫날인데 실수 좀 할 수 있지.' 라며 사장 탓을 했다. (물론 토스트를 태운 것보다는 상황에 맞게 센스 있게 대처하지 못한 탓이 컸다.)

  연락을 주고받던 상대방이 갑자기 나를 차단했을 때에도 '무례하게 갑자기 잠수 차단을 하네. 이 사람 그동안 예의 바른 척 연기했던 거구나.' 라며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바빴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상대에게 돌려야 내 자아에 손상이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혹시 나의 어떤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스스로를 공격하고 상처받기 싫어 이내 그 원인을 상대방이나 상황에게 돌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굉장히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는 것,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루의 대부분을 방에 틀어박혀서 온라인 게임을 하며 보냈다. 현실에서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온라인 게임에서만큼은 내가 주인공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벽 2시까지 게임을 하고 난 후에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인터넷을 통해 접하게 되는 또래 대학생들의 행복해 보이는 술자리 사진이나 여행 사진, 커플룩을 맞추고 카페 가서 데이트하는 사진들은 나를 미친 듯이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고 질투도 났다. 동시에 나는 절대 저런 경험을 하지 못한 채로 내 젊은 시절을 아깝게 흘려보낼 것 같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난 왜 인기가 없을까? 나 같은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 돈이라도 많이 번다면, 내가 아닌 내 돈을 보고서라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내 모습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웠던 이유를 '사회적 지능' 이 부족해서가 아닌, 경제적 능력 혹은 학업적 능력이 충분치 않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학점 관리와 영어공부, 개발 공부에 신경을 쏟으며 '나의 쓸모를 증명'하면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모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노력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해 학점을 잘 받아 장학금을 받고 토익이 900점을 넘어도, 여전히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나는 계속 혼자였다. 그래서 이런 우울함을 잊기 위해 또다시 게임을 켜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을 바꾼 그 말을 몇 안 되는 절친한 친구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 친구는 어딜 가나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인기가 많은, 나와 정 반대되는 친구였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눈치 없는 거, 주변에게 피해를 끼치는 거야.
사람들에게 정말 관심받고 싶어?
그럼 먼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봐."

  


  지금은 이 말을 해준 친구에게 너무나 고맙지만, 그 당시의 나는 이 말을 나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이거 지금 나랑 싸우자는 뜻인가?'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그 친구가 의도적으로 강한 어투로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던 나에게 그 말은 상당히 기분 나쁘게 다가왔다.


부끄럽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나의 결점이나 실수를 인정하는 걸 정말로 싫어했다.
완벽주의에 빠져 모든 걸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여나 내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괜찮아, 나는 대신 이걸 잘하잖아.' 하며 정신 승리했다.
내 부족함을 인정해버리면 내가 모자란 인간임을 인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을 했었다.


  내 표정에서 드러난 감정을 읽었는지, 그 친구는 한층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는 분명 장점이 많은 사람이야.
성실하고, 똑똑하고, 말도 논리적으로 잘하고 심성도 착해.
그런데 너의 단점들이 그 장점들을 가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집중해봐.
진짜 중요한 진실은 말이 아니라
표정과 행동, 그 사람의 눈빛에 담겨있는 경우가 더 많아.


    

  한평생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내가 이 말을 듣고 기적적으로 변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의 애정 어린 말조차 부정하고 몹시 기분이 나빴다. 대충 아 그렇구나 하며 맞춰주다 집에 들어와서 씩씩거렸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생각에 잠기며 친구가 해 주었던 말들을 계속 되새김질하고 곱씹어보니, 분하지만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지나 올해가 되어서야 이게 '자의식 해체'의 시작 과정이었다는 것을 올해 읽었던 '역행자'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역행자'의 자청에게서 몇 년 전 나에게 충고를 해 주었던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친구가 내게 해 주었던 충고처럼, 나는 '역행자'를 읽는 내내 편함보다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에게서도 나의 단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 친구 입장에서도 굳이 내 단점을 꼬집어 굳이 논쟁이 오갈 수 있는 상황을 감수하느니,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게 훨씬 편했을 것이다. 마치 토스트 가게 사장님과 영화관 점장님이 그랬던 것처럼.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서도  '절대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라, 그것은 한 인간의 소중한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결국 그 사람의 원한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내 인생을 진정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 건, '너는 잘하고 있어! 힘내, 넌 대신 다른 걸 잘하잖아'라며 나를 편하게 위로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나 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나의 부족한 점을 꼬집었던,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불쾌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친구의 불편한 말이었다. 다행히도 친구의 말이 단순히 짜증이나 참견으로 비치지 않았던 건, 평소에 나를 정말 아낀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던 친구의 진심 덕분이었다.


 

  '역행자'에서 자청은 자의식 해체 과정이 탐색, 인정, 전환 순으로 진행되며, 결코 단번에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자의식 해체 과정도 영화나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때로는 그 과정이 너무 더디고 힘들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느리지만 분명하게, 내 삶에 희망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나의 모자람을 인정하기 싫어해 변명을 늘어놓기 바빴던 나는 어느샌가 진정으로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그런 과정에서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기도 하며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체감하는 순간에는 짜릿할 정도로 행복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래서 '내 사회적 지능이 이제는 높은가?'를 생각해보면 수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아직도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있었던 그때와 비교하면 정말 많은 게 변했다. 덕분에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평생 나의 결점을 모른 채로 외롭게 살아갔을지도 모르는 나에게, 본인을 미워하게 될(어쩌면 절교까지도) 각오를 감수하고 용기 있게 그 말을 꺼냈던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좋아한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 모임인 줄 알았는데 다단계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