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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May 11. 2020

'어쩌고'는 이제 그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나는 내 마음대로 물건에 이름을 붙이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우리 집 해피 트리의 이름은 건강이(단순히 쑥쑥 잘 자라나니까)이고, 마사지기는 돌돌이(동그란 볼이 돌면서 마사지해줘서), 우리 딸 바이올린은 바순 이이다. 그러다 보니 기존에 이름이 있는 사물의 원래 이름을 기억하는 데에 많이 서툴다. 리코타 치즈를 라코타 치즈라고 부르고 콘트란 쉐리에(빵집 이름)를 곤드레라고 부르곤 한다. 


나는 사람들이 심지어 외국어로 된 긴 이름을 어찌 그리 잘 외우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파우더 키스 립스틱 만다린오 주세요."

화장품 매장 앞에서 중3 딸은 무슨 색인지 감도 안 잡히는 립스틱 이름을 읊는다. 도대체 인생에서 '파우더 키스 립스틱 만다린오'를 몇 번이나 불러봤길래 저리 망설임도 없이 쭉 말할 수 있는 걸까? 


"저기 블루베리 어쩌고 향 주세요." 

딸과는 반대로 향수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 난 점원에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 고객님 블랙베리 앤 베이 말씀하시는 거죠?"

나 같은 고객이 한둘이 아닌지 점원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16살 된 딸에게 나의 물음은 너무 창피했나 보다. 

"엄마, 블루베리에서 향 나는 거 봤어? 그렇게 먹어보고도 모르겠어?"

"서로 의사소통되면 된 거 아냐? 향수 이름 정확히 외우는 게 그렇게 중요해?"

"아니, 그래도 블랙베리를 블루베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엄마 통역사잖아, 게다가."

"하도 이것저것 외울게 많아서 블랙베리 들어갈 자리는 없다, 왜!"


물론 신경을 좀 쓴다면 향수 이름 하나 외우는 게 그리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향수 이름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빵집 이름도, 레스토랑 이름도, 심지어 카페 신메뉴 이름조차 요즘은 너무나 이국적이다. 거의 새로운 단어 하나를 외우는 수준이랄까. 새로운 단어 하나를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려면 적어도 수십 번은 그 단어를 문장에서 활용해봐야 하는데, 내가 빵집, 레스토랑, 향수 이름을 문장에서 수십 번씩 사용할 일이 뭐가 있겠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이름들을 아주 가끔 사용해야 할 때마다 '곤드레 어쩌고, 블루베리 어쩌고' 등 '어쩌고'가 붙을 수밖에.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어느 시에서처럼 무엇인가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여하튼 누군가는 그러한 이름을 짓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또 고민의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을 거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버젓한 이름이 있는데 자꾸 '어쩌고'를 붙이는 나의 버릇은 비록 상대가 사물일지라도 상당히 무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 맘대로 이름을 붙이거나, '어쩌고'로 퉁치는 대신,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보기 위해 노력을 해볼까 한다. 뭐, 이국적인 긴 이름을 탓하기 전에 영어 단어 하나 외운다고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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