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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ug 13. 2020

한국사회에서 다리 굵은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한국에서 다리

내 딸은 나를 다리 집착녀라고 부른다. 치마나 반바지를 입은 여성이 우리 앞을 지나가면 나는 어김없이 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딸, 엄마 다리가 굵어? 저 여자 다리가 굵어?"

그러면 우리 딸은 아주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그만 좀 하지, 이 다리 집착녀야."라고 쏘아붙인다. 

여기서 굴하면 진정한 다리 집착녀가 아니다.

"그래, 엄마 다리 집착녀 맞아.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물을게. 내 다리가 저 정도야? 더 굵어?"

"그게 왜 중요해?"

"저 정도면 반바지를 입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입고 싶으면 입어. 아무도 엄마 다리에 신경 안 써. 그렇게 신경 쓰이면 지방 흡입을 하시던지!"

"대답해 줄 수 없는 거야?"

"응, 대답해 줄 수 없어! 이건 엄마를 위한 일이기도 해."

"엄마 소원인데도?"

"그만하지?"

딸이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곧잘 대답을 해 줬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아가면서 얘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지 이젠 대답을 거부한다. 섭섭하게도 얘들은 너무 빨리 큰다.


내가 이런 질문을 딸에게 하는 것이 정말 교육적이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먼저, 딸에게 신체의 특정 부위를 비교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더 나쁜 것은 본인이 비교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피해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외모지상주의라는 현대 사회의 잘못된 관념을 딸에게 심어주고 있다. 다리가 아무리 굵고 못생겨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반바지를 입고 활보하는 엄마가, 남들에게 다리 굵어 보일까 봐 전전긍긍해 푹푹 찌는 여름에도 긴바지를 고수하는 엄마보다 딸에게 긍정적인 가치관을 심어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래, 이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나는 어쩌다 다리 집착녀가 되었을까?  딸에게 그 구박을 당하면서도 매번 여성들의 맨다리가 앞에 보이기만 하면 왜 내 다리와 비교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걸까?


솔직히 한국사회에서 자존감 높은 다리 굵은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다른 곳은 좀 뚱뚱해도 괜찮지만 다리만은 양보할 수 없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오죽하면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라는 노래 가사가 있겠는가. 


비단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하루키도 소설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여성들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근사한 다리'를 빼먹지 않는다. 내가 만약 그 '근사한 다리'를 가졌더라면 그 문구가 그리 박히진 않았을 텐데, 굵고 못생긴 다리를 가진 다리 집착녀에게 그러한 수식은 좀 아프다. 단순히 하루키 취향의 문제라면 할 말은 없지만. 한 번쯤 하루키가 '코끼리를 연상시키는 길고 튼튼한 다리를 가진 매력적인 그녀'를 소설에 등장시킨다면 어떨까?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 주인공은 있어도, 다리 굵은 여자 주인공은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의심해봐야 한다. 배우가 되기 위해 다리 굵은 여성들이 넘어야 할 진입장벽이 유독 높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어쩌면 코끼리 과였던 많은 여성들이 배우가 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렸을 수도 있다.


굵은 다리가 건강, 힘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도 연상시킨다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늘씬하고 탄탄한 다리로도 건강미는 충분히 발산될 수 있다. 이러한 내 속도 모르고 낼모레 70인 우리 엄마는 내 굵은 다리를 부러워한다.

"넌 좋겠다, 다리 굵어서. 늙으면 다리가 굵어야 해. 그게 건강한 거야."

엄마, 차라리 60 평생 날씬한 다리로 살다가 늙어서 좀 아플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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