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일지라도 나에겐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말이 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응원이나 격려, 칭찬과 같은 것이라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대개는 상처가 되는 말이다. 또한 나는 그 상처되는 말을 들었을 때 적절히 대응할 '골든 타임'을 놓쳐 이불 킥하며 분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딸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딸아이의 학원 근처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네 딸 친구 엄마를 만났다. 어디서 들었는지 우리 딸이 영재고 준비반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물어왔다.
"영재고 준비한다며?"
"네, 다들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한다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뭐,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준비한다니까."
"네? 우리 딸이 개나 소는 아니죠."
"그럼, 그 집 딸은 개나 소도 못 돼. 지금 준비하면 강아지야, 강아지."
"네? 강아지요?"
정말 생각지 못한 공격이었다. 우리 딸이 개나 소도 못되고 강아지라니, 순식간에 후두부를 강한 펀치로 가격 당한 기분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그냥 멍하니 그 엄마를 바라봤다. 버럭 화를 내지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하냐며 따지고 들지도 못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말을 한 당사자는 너무나 해맑았다. 자신이 한 비유(?)가 너무 만족스러운지 나에게 활짝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후로 난 그 엄마만 보면 그 강아지 일화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물론 본인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아마 그런 말을 한 것조차 잊었겠지. 하지만 그 엄마는 내 휴대폰에 강아지라고 저장되어 있다. 뭐, 소심한 복수랄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딸아이는 영재고 시험을 봤다. 다행히 2차 필기시험까지 합격을 하고 3차 면접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우연히 그 '강아지' 엄마를 만났다.
"어떻게 됐어? 합격했어?"
"네, 2차 합격하고 3차 면접 기다리고 있어요."
"2차 합격했다고? 진짜?"
"네, 운이 좋았네요."
"진짜 잘하는 애들은 의대 갈려고 영재고 시험 안 본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네?"
"그래도 대단하네, 축하해."
이번에도 방심하던 차에 펀치가 훅 들어왔다. 하지만 난 또 타이밍을 놓쳤다. 아, 난 정말 순발력이 부족하다. 강아지 엄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딸을 꼭 영재고에 합격시켜 강아지 엄마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드디어 3차 최종 합격자 발표날. 발표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접속을 하고 결과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불. 합. 격.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딸이 실망할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2년 반 동안의 고생이 한순간 스쳐 지나가면서 딸아이가 너무 애처롭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날 밤, 학원에서 돌아온 딸의 기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이 위로가 될지, 혼란스러웠다.
"엄마, 나 떨어졌어."
"응, 알아. 괜찮아?"
"괜찮아. 딱 10분 슬펐어."
"그래?"
"응. 뭐 영재고 못 간다고 인생 망하는 거 아니잖아."
딸아이는 정말 쿨하게 낙방의 슬픔을 이겨냈다. 정말 딱 10분만 슬펐는지는 모르겠으나, 딱히 미련을 갖거나 낙담하는 기색은 없다. 인생에서 겪은 첫 실패라 많이 좌절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우리 딸은 의연했다. 영재고를 준비하며 2년 반 동안 최선을 다한 것도, 아쉬운 결과지만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 후로도 강아지 엄마는 동네에서 몇 번 마주쳤다. 딸이 불합격했다는 소식에 더 이상 미운 말은 하지 않고 나름의 위로를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는 이제 강아지 일화를 떠올려도 예전처럼 분하지가 않다. 시간이 지난 탓도 있겠지만, 누가 뭐라 하건 딸의 진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