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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Dec 16. 2020

괜찮아,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나는 결정장애가 심하다.  우유부단한 성향이 강하기도 하고, 너무도 결정을 잘하는 엄마를 둔 탓에 자라나면서 스스로 결정을 하는 연습을 많이 못해본 탓도 있는 듯하다. 여하튼 뭘 먹을까? 뭘 입을까? 뭘 살까? 어디를 갈까? 늘 고민이다. 이런 내가 난생처음 내 이름으로 된 집의 인테리어 공사를 계약하면서 인테리어에 관련된 모든 것은 직접 고르고 결정하겠노라고 결심했다. 엄마에게도 딸에게도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할 터이니 절대 간섭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인테리어 공사와 함께 시작된 선택의 연속. 익히 예상한 벽지, 바닥재뿐 아니라 수전, 문고리, 베란다 탄성 코드, 타일의 메지 색까지... 결정해야 할 것들 산더미였다. 무슨 결정 연습을 시키듯 인테리어 사장님은 이틀이 멀다 하고 전화를 해 결정을 요구하였다.


"베란다 탄성코트 샘플 보냈습니다. 어떤 색으로 할까요?"

"어떤 색을 제일 많이 하나요?"

"보통 루비 색을 제일 많이 합니다."

"조금 더 밝은 색은 없나요?"

"샘플 더 보내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결정해 주세요."


그럼 난 그때부터 인테리어 사장님이 대충 흔들리게 찍어 보낸 흐릿한 탄성코트 색들을 비교하며 고민에 휩싸인다. 인터넷을 검색하며 요즘 무슨 색이 제일 핫한지, 정말로 루비 색을 많이들 하는지, 내가 생각한 집 인테리어 콘셉트와는 어떤 색이 제일 어울리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집 인테리어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결정했다. 그리고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어느 주말, 엄마와 딸을 대동하고 내 "결정들"의 결과물을 확인하러 집으로 갔다.


"엄마, 바닥이 이게 최선이었어? 벽이 하얀데 바닥 색이 너무 짙잖아."

"애야, 무슨 병원도 아니고 온통 벽이 하얀색이냐? 아이고, 베란다 페인트도 하얀색이네, 무슨 하얀색에 원수 졌니?"

"엄마, 부엌은 인테리어 새로 한 거 맞아? 꼭 우리 학교 급식실 같잖아. 이 회색 대리석, 이거밖에 없었어?"

"아니, 화장실 타일 색이 이게 뭐니? 바닥을 좀 더 짙은 타일로 했었어야지. 어중간하게."


엄마와 딸은 아주 신이 났다. 엄마는 벽과 화장실이 마음에 안 들고, 딸은 바닥과 부엌이 마음에 안 든단다. 그렇게 고심했는데, 최악의 선택들을 한 것인가... 기가 팍 죽었다. 괜히 인테리어 공사한다고 돈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딸은 내 가슴에 한 번 더 비수를 박았다.


"엄마 전공이 주거환경학과(Housing & Interior Design) 아니야?"

"응 맞아."

"힘들었겠다, 4년간. 재능이 없어서."

"뭐라고?"

"내 탓이야. 내가 엄마한테만 맡기지 말고 중간중간 체크를 했었어야 했는데, 학원 다닌다는 핑계로 너무 무심했어. 누굴 탓하겠어."


한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래, 아직 전두엽도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냥 어른인 내가 참자' 하며 넘겼다.


뭐, 엄마와 딸에게 이런저런 크리틱을 듣고 하루 이틀 의기소침했지만 지금은 괜찮다. 솔직히 나도 내 선택이 100%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아니 아쉬운거 투성이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한 결정 장애인 내가 모든 걸 결정해서 인테리어 한 집이라는데 의의가 크고, 하나하나 결정을 할 때 난 아낌없이 시간을 들여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부족한 재능이나 역량은 조금씩 살면서 채워나가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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