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에는 사람들에 대한, 나도 모르는 편견이 가득하다
해가 내리쬐는 평일, 나에게 소소한 기쁨이 있다면 현관문을 활짝 열고 무엇이든 빨아서 말리는 것이다. 밀려있는 빨래를 해가 쨍한 날에 건조대에 널어두면 그렇게 든든하고 뿌듯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집안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내가 유독 잊지 않고 열심을 내는 일이 빨래다. 물론 빨랫감이 쌓이면 당장 입을 옷이 없고 쓸 수건이 없다는 것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이보다 조금은 큰 기쁨은 그렇게 빨래를 널어놓고, 모든 창문과 현관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서 현관 바로 앞에 있는 소파에 누워서 책을 보는 것이다. 2인이 살기에 딱 적당한 우리 집은 본래 소파를 들여놓기 참 애매하다. 그래도 편안한 소파 하나 있는 것이 좋겠다며 구매한 2인용 소파는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다 결국 현관 옆, 신발장을 마주 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너무 신발장 앞에 소파가 있는 것 아닌가 싶어 찝찝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발을 벗자마자 누울 수 있다는 것, 현관을 열었을 때 해를 쬐며 누워있을 수 있다는 것, 이래저래 아무튼 누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소파가 최적의 자리를 찾은 덕에, 문을 열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물론 미세먼지가 나쁜 날은 제외한다.) 차 한 잔을 끓여서 한량처럼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보는 것이 어느새 날씨가 좋은 날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가 되었다.
가을이 왔다. 가을의 맑은 날은 올려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하늘과 쨍쨍한 햇볕을 선사한다. 그리고 10월의 마지막을 지내는 이번 주에도 동일하게 빨래하기 딱 좋은 가을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날씨에 부응해서 이번 주도 여름 내내 침대 위에 깔고 잤던 이불과 쌓여있는 수건을 빨았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고 빨랫감을 걷어 기분 좋게 현관문을 열었더니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있었다.
여느 동네나 똑같겠지만 우리 동네에도 고양이가 참 많다. 지금 살고 있는 동작구 본동 자체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다가 구석구석 고양이가 지나다닐 틈이 많다. 특별히 우리 주택은 고양이들의 아지트요, 만남의 광장이다. 옆 집이 빈집이라서 지붕에 고양이들이 모여 사는데, 그 지붕이 우리 주택의 화단과 맞닿아 있다. 고양이들은 자유롭게 옆집의 지붕과 우리 화단을 넘나들며 생활한다. 낮이나 밤이나 안락한 우리 주택 안에 머문다. 우리 집 현관보다 옆 집의 지붕이 더 시야가 낮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원치 않게 고양이들과 아이컨택을 하기도 한다.
빨래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대문 위에서 한가롭게 햇빛을 쬐고 있었다. 내가 빨래를 널기 위해 부스럭부스럭 건조대를 펼쳤더니 휙 돌아보고는 옆 집 지붕으로 넘어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상황이 익숙한 나는 잠시 같이 째려봐주다가, 이내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몸짓으로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실내에서는 잘 마르지 않는 두꺼운 수건들을 한가득 널고는 만족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나는 동물과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다. 심지어는 무서워한다. 개와 고양이가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이라던데, 나는 인간과 가장 가까워서 늘 볼 수 있는 개와 고양이가 동물원에 가서만 볼 수 있는 사자보다 무섭다. 특히 고양이는 올려다보는 눈이 무섭다. 어렸을 때부터 미스터리 소설을 많이 봐서 그런지 몰라도 고양이를 보면 자연스레 관련된 괴담들이 생각난다. 예컨대 자꾸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집의 벽을 뜯어보니 눈을 부릅뜬 고양이의 시체가 있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들. 당시 상상했던 이미지 자체가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고양이에 대한 무서움이 단순히 어렸을 때 들은 한두 가지 이야기들 때문만은 아니다. 습관처럼 밤을 새우곤 하는 나는, 깨어있는 새벽에 대부분 밖에서 들려오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냥 애처롭게 야옹야옹 우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서로 싸우며 물어뜯듯이 격렬하게 울기도 하고, 가끔은 주인집 아주머니 손자가 왔나 싶을 정도로 리얼한 아기 울음소리여서 소름이 끼친다. 동네에서 고양이를 마주칠 때면 사실 두려움과 무서움이 크다.
날 좋은 날, 나만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고자 현관문을 열었는데 맞은편에 고양이가 있을 때면 굉장히 난처하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왠지 고양이가 내 빨래들을 헤집어놓고 내 구역에 침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햇빛이 이렇게 강하고 좋은데 문을 닫아 두기도 너무 아까워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문을 닫지 않고 긴장한 상태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현관을 예의 주시하며 긴장은 하지만 쨍한 햇빛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니 또 기분이 좋아서 누웠다가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가, 깜빡 졸았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잠깐 졸았다가 화들짝 놀라서 깼다. 일정이 있어 나갈 시간이 다 됐다. 활짝 열어두었던 현관문을 닫고 부리나케 준비했다. 옷을 다 입고 가방을 챙기고 신발까지 신고서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아까 나를 긴장하게 했던 그 고양이는 옆집 지붕 위에서 세상 모든 평화를 다 만끽하고 있다는 듯이 자고 있었다. 해를 쬐며 지붕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자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잔뜩 긴장한 채로 화들짝 놀라 일어난 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 저 고양이는 처음부터 나와 긴장감 있는 대치 상황을 만들 마음이 없었는데. 그럼 나는 도대체 왜 혼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거지? 생각해보면 고양이나 나나 똑같이 편하고 안전하게 해를 쬘 공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길고양이가 사람의 집에 들어온다는 게 쉽지도 않은 일일뿐더러, 저렇게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늘어지게 자고 있는 고양이인데 나는 왜 그리 잔뜩 긴장했던 걸까. 그냥 평화롭게 나는 나의 공간인 2인용 소파 위에서, 고양이는 고양이의 공간인 옆집 지붕 위에서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면 충분한 것을 굳이 고양이를 적으로 돌려 그 시간을 누리지 못한 나 스스로가 어쩐지 허무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와 같은 긴장을 비단 고양이에게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유난히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대하는 때가 있다. 어렸을 때 읽었던 괴담이나 한 밤 중 들리는 고양이 소리로 인해서 내가 '고양이'라는 생명체에게 가졌던 편견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대해 읽고 들은 것으로 생긴 편견은 꼭 그 사람을 대할 때 긴장감을 갖게 한다.
저 사람이 과거에 저랬다더라, 저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더라, 저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다더라, 저 사람이 정말 꼴불견인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낸다더라, 저 사람이 그런 글을 sns에 올렸다더라. 사실 전혀 가깝게 지내본 적도 없는, 그저 우리 집 현관과 옆 집 지붕의 거리 정도에서만 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보고 듣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나에게 제공된 정보가 그것이고 나는 그 정보를 받아들여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상상해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자극적인 정보들은 유독 선명하게 이미지를 만든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실제로 그 사람을 마주할 때, 십 중 팔구 보고 들은 내용으로 만들어진 나의 편견을 깨닫는다. 실제로 관계를 맺고 같은 영역 안에 있다 보니 내 생각보다 그 사람은 성격이 좋고, 내 생각보다 그 사람은 호감이고, 내 생각보다 그 사람은 긍정적이고, 내 생각보다 그 사람은 장점이 많고, 내 생각보다 그 사람은 나와 잘 맞다.
어쩐지 고양이에게 불필요하게 긴장을 하고 난 후의 허무함이, 누군가에게 불필요하게 긴장을 하고 두려워하다가 나의 편견을 깨닫고 느낀 허무함과 비슷하다. 나와 긴장감을 가지고 대치할 생각도 없는 사람, 그저 자기 영역에서 부지런히 살고 있는 그들에게 괜한 에너지를 쏟은 일이 이제껏 얼마나 많았을까. 정작 그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좋은 날씨와 햇살을 누리며 자기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도.
나의 경험으로 축적된, 내가 가진 편견을 깨닫는 일은 허무하기도 하고 동시에 가뿐하기도 하다. 지금까지 쏟은 에너지가 아까워서 허무하고 앞으로 똑같은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돼서 가뿐하다. 오늘 하루 허무함과 가뿐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내가 또 누구와의 관계에 긴장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 긴장감의 근원을 찾다 보면 반드시 보고 들은 정보들을 토대로 한 나의 편견이 숨어 있을 것이고, 그 편견을 깨트리고 긴장감이 사라지면 또다시 오늘의 허무함과 가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의 가뿐함은 집 앞에서 마주치는 고양이들을 새롭게 보는 눈을 주었으니, 내일의 가뿐함은 더 중요한 사람들을 새롭게 보는 눈을 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