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도 나도 매일 열심히 자라고 있다
만 5개월을 지나 6개월을 향해 가고 있는 아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신생아 시기를 지나 터미타임(엎드리는 동작)을 열심히 연습했고, 갈수록 엎드려서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100일이 갓 지나 뒤집기를 했다. 사람인가 아닌가 깊이 고민하게 만들던 무표정은 어느새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옹알이가 늘어나면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다양해졌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 무언가 불편할 때, 기쁘고 즐거울 때 모두 옹알이와 돌고래 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한다.
또 어느샌가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불안할 때면 울음으로 엄마를 찾는다. 누군가 안고 있을 때는 자신을 안고 있는 이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몇 번을 올려다보며 확인한다.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아직 남자 사람을 많이 접하지 못해서 인지, 나의 아빠와 남동생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곤 한다. 아기를 좋아하는 나의 남동생은 자신의 존재를 아기에게 알리기 위해 부지런히 우리 집에 방문하고 있다.
처음 산책을 나갔을 때 아기는 잔뜩 얼어붙어 잠들기 바빴다. 그러나 이제는 여유가 생겨 한쪽 다리를 척하고 유아차 안전바에 올리고선 세상을 구경한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강과 꽃과 나무와 아파트를 구경하다가 기분 좋게 스르륵 잠이 든다. 몸집이 작을 때는 아기띠가 불편하다며 울어댔던 아기가 지금은 아기띠를 즐기고 있다. 아기띠를 둘러 품고 있으면 고개를 들어 엄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어느새 손으로 장난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한참을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한다. 집중력도 꽤 좋아져서 그림책을 놓으면 한참을 들여다본다. 언젠가부터 아기는 손톱과 손끝으로 물건을 연신 만지며 사물을 탐색하고 있다. 손톱으로 긁어 소리도 들어보고 손끝으로 삭삭 문지르며 새로운 감촉을 느끼기도 한다. 또 헥헥거리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간다. 먹고 자고 싸는 일련의 생활 패턴이 어느새 익숙해진 아기는 열심히 먹고 열심히 자고 또 열심히 싼다. 그 생활 속에서 일어난 모든 변화는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아기의 애씀의 결과다.
170일이 조금 안된 지금, 아기의 앞에는 여전히 많은 숙제가 잔뜩 놓여 있다. 뒤집기가 익숙해져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뒤집어서 보내고 있는 아기는 이제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기어 다닐 준비를 하고 있다. 또 허리와 등에 힘이 생기면서 점점 앉아서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고 앉아 있는 각도가 커지고 있다. 엊그제는 이유식을 시작했는데, 난생처음 숟가락으로 난생처음 맛보는 식재료들을 열심히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다. 또 이가 나오려는지 하루 종일 보채고, 보채고 또 보챈다. 아파서 엉엉 울며 무언가 입에 물 것을 찾는다.
아기가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에 열심히 임하는 만큼 엄마의 다크서클은 늘어간다. 백일 무렵 뒤집기가 하고 싶어서 몸을 틀고선 고래고래 울던 아기는 이제 기어가고 싶어서 끙끙대며 울음 섞인 짜증을 낸다. 조금 천천히 해도 되련만, 여유 없이 악착같이 해내려는 모습이 꼭 엄마를 닮은 듯하다. 엄마와 아빠가 먹는 모습을 이미 몇 달 전부터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기는 적은 양이지만 첫날부터 이유식을 잘 받아먹었다. 그저 이유식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부담이 가득할 뿐이다. 이앓이는 단연 다크서클의 일등공신이다. 잘 놀다가도 강성 울음을 터뜨리고, 자기 전에는 한 시간 정도 목 놓아 울고서야 잠이 든다. 이는 왜 차례차례 나는 걸까? 한 번에 다 나면 안 되는 걸까? 30개월까지 기다려야 모든 이가 자리를 잡는다고 하니 아직 0개의 이를 가진 아기가 너무 불쌍하고 그 아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사실이 아찔하다.
열심히 자라나는 아기를 지켜보는 일은 꽤나 즐겁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힘든 이유는 그가 자라나기 위해서 필시 나의 손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그 명백한 이유를 즐거움이 꾹꾹 눌러 밟는다. 신생아 시기가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 아쉽고, 준비해 둔 옷이 작아서 못 입게 되었을 때도 아쉽다. 아기는 금방 커버리니 그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라던 많은 이들의 조언은 사실이었다. 비록 울며 나의 머리를 잡아 뜯는 아기를 안고 있는 시간에는 얼른 이 시기가 지나가버렸으면 하고 바라지만,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고는 싱긋 웃어주는 아기를 볼 때면 이 시기가 조금은 천천히 지나갔으면 한다.
아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기마다 자연스레 발달 과정을 거치고 있다. 열심히 용을 쓰고 낑낑대며 결국은 해낸다. 그 모습이 참 기특하다. 그러다 문득 나 또한 저 아기의 모습에서 지금의 내가 되었음을 떠올린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하나하나 해냈을 것이다. 엎드리고, 뒤집고, 기어가고, 앉고, 서고, 걷고. 말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매 시기마다 나에게 주어진 숙제들을 성실히 해온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나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 정말 대단하다. 부모의 손길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도 맞지만, 결국 내가 자라는 것은 다른 누구의 몫이 아닌 나의 몫이기에, 나 자신을 온전히 칭찬해도 괜찮을 것이다. 저 작은 아기에서 열심히 자라서 또 다른 아기의 엄마가 된 나, 정말 칭찬한다.
아기와 종일 붙어 있는 매일은 행복함과 답답함의 롤러코스터다. 엄마와 아빠를 쏙 빼닮은 아기를 보면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다가도, 갑자기 나 자신은 멈춰있다는 생각이 훅 밀려온다. 지금의 나는 무얼 하고 있지. 내 삶은 늘 성취의 연속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무엇을 성취하고 있지.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은 누군가는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더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어쩌면 나는 아기를 핑계로 2023년의 나로 평생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젖병은 닦아도 끝이 없고, 집은 청소를 해도 끝이 없고, 아기의 곳곳을 살피고 돌보는 일도 끝이 없다. 시간을 쪼개어 2024년의 나, 2025년의 나, 2030년과 2040년의 나, 그 이후의 나를 위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함이 가득하다.
육아의 시간은 예상보다 더 나의 마음을 사지로 몰아간다.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는 기분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던 육아는 나를 무지한 사람, 작은 것 하나에도 벌벌 떠는 소심한 사람으로 만든다. 새벽마다 아기의 작은 소리와 움직임에도 벌떡 일어나 상태를 확인하는 5개월 차 초보 엄마는, 양육자로서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나의 무지함으로 인해 이 작은 사람의 몸이나 마음, 인생이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성경과 주석 대신 육아책을 보고 있는 전도사는, 사역자로서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계속해서 사역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욕심은 아닐까, 이렇게 혼자 고민만 하다가 받은 사명이 점점 흐려지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도 아기를 두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 몇 달 만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브런치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부지런히 읽고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과 손가락은 무겁고 엉덩이는 참 가볍다.
어느 누구라도 육아든 살림이든 사역이든 글쓰기든 나보다 잘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낑낑대며 나에게 현재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다가 문득, 기어가기 위해 열심히 낑낑대고 있는 아기를 본다. 매일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해나가는 아기가 기특하다.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완수하며 여기까지 온 내가 기특하다. 아기는 매트 위에서 낑낑대다 보면 언젠가 앞으로 기어가는 날이 올 것이고, 나는 온 집안을, 키보드와 책장 위를 누비며 낑낑대다 보면 언젠가 훌쩍 앞으로 이동해 있을 것이다. 앞으로 기어가기 위해서 아기에게 악을 쓰며 울어대고 짜증을 내는 시간들이 필요하듯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에게도 멈춰 있는 것만 같고 답답하고 울고 싶은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시간을 아기와 같이 마주 보며 용을 쓰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앞으로 앞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아기도 나도 부쩍 자란 모습에 서로를, 자기 자신을 칭찬하기 바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