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영, <감옥으로부터의 소영>, 봄알람
* 책을 소개하거나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정보성 리뷰가 아닌, 책을 읽고 떠오른 마음을 자유롭게 쓴 에세이입니다. 스포일러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책의 내용을 일부 담고 있습니다. 때로는 엉뚱한 부분에 꽂혀 책의 내용과 동떨어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현대사>를 인상 깊게 읽었다. 교과서나 객관적인 시각이 담긴 책에서만 보던 한국 근현대사를 한 개인의 입장으로 읽는 일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역사를 보는 경험을 선사했다. 그리고 이 책, <감옥으로부터의 소영>에서 서울 중심의 남성의 시각이었던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더 나아가 수도권을 벗어난 대전 지역에서,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유신 치하 이후 근현대사를 만날 수 있었다. '여성'의 주관적인 역사 기록인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실제로 겪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역사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며 행동하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일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저자 '소영'은 유신 치하에서 대학을 다닌 학생이다. 저자 소개에 의하면 그녀는 씨받이 엄마에게서 태어났다. 대전 지역에서 살았고 동 지역 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해 총탄에 죽어가는 광주의 절규를 보며 헤아릴 수 없는 분노"를 만났다. 이 책은 그녀의 어머니에게, 양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친구들에게 감옥에서, 집에서, 또 어떤 곳에서 쓴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편지 속에서 만나는 '소영'의 인생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기구함 그 자체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기구한지 일일이 열거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책을 통해 직접 아프고 소중한 그녀의 삶과 그 삶에 깃든 근현대사를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소영'을 통해 보았던 것은 '평생을 거대한 무언가와 싸워 온 여성의 삶'이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학생으로서 거대한 독재정권에 대항해 싸워 온 것과 더불어, 그녀는 여성으로서도 거대한 무언가와 계속 싸워야만 했다. 운동권 내부에서 남성인 선배에게 당한 일,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남성인 리더의 처분, 자신을 좋아하는 남성인 친구에게 털어놓는 여성으로서의 고충, 감옥 안에서도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치욕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자신을 소개하며 적은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내내, 독재라는 감옥에 맞서는 운동권 내부에서 또 하나의 지독한 감옥을 만났다. 여성은 두 개의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 대다수의 무지한 자는 여성을 끝없이 감옥 속으로 처넣으려 한다는 것을 삶을 통해 알았다. (책의 날개, 저자 소개 중)
책을 읽는 독자인 나에게 '소영'은 평생을 가치와 신념을 지키며 행동한 여성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와 신념에도 성실히 반응한 사람, 개인의 신념에도 성실히 반응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지금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젊은 여성들의 선배이다. 그것이 어떤 범주의 가치와 신념인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서간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녀의 고뇌와 고민들을 읽을 때는 내가 가진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흠칫했다.
나는 내 말에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스스로 믿는 것을 위해 회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나 자신이 망설이지 않을 무언가에 과연 나는 얼마나 깊은 신뢰를 가졌는가,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말로만 떠들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뻔지르르한 거짓말쟁이 가짜 휴머니스트일 뿐 아닌가? p.85
페미니스트로 살다 보면 간혹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고기와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감정을 소모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최종적으로는 나의 삶을 소모하며 지켜내려고, 얻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이것이 결국 마지막에 갔을 때 뼈만 남은 앙상한 물고기의 모습을 하는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이런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어려운 것은, 내가 놓아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 꽁꽁 감춰 두었던 그 두려움을 다시 꺼내 마주하고 다시금 처리할 수 있었다.
투옥된 '소영'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담긴 편지들과 소중한 친구 '경인'의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읽을 때에 슬며시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 감정과 마음은 그저 '소영'에게 이입되어 느낀 것, 제삼자 입장에서의 슬픔과 공감이었다. 그러나 닫는 글, 딸 '나래'에게 쓴 편지에서는 "이 시대를 겪어갈 우리의 딸(p.293)"인 나에게 도착한 편지인 것 같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 불편하고 언짢은 상황은 늘어가고 분노와 좌절이 뒤섞이는데,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어 결국 힘이 빠지고 마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된다. 그 사이 그물이든 낚싯대든 작살이든, 자꾸만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오른다. 그럼에도 차마 놓지 못한 그것을 다시 기운을 차리고 잡아내어 고군분투한다. 이런 삶을 헤아리듯 "나의 딸아(p.296)"하며 건네는 말이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책은 여성으로 살며 망망대해에서 홀로 배 위에 서 있는 기분을 느낄 때, 바로 그때 손에 쥔 것을 다시 꽉 잡기 위해 찾아 읽을 소중한 책일 것이다.
성취해갈 자유는 무한한데 멈춰서 슬퍼하기만 한다면 백배 더 억울하잖아. p.295
비록 어느 때에는 실수를 하고 무지로 인한 자신만의 틀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해도, 길은 그렇게 가야 한다는 것을. 한 발 한 발 정직하되 그 걸음은 평등 안에서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을 너는 보여주었다. p.296
남김없이 저항하고 성취하여야 마침내 때가 되어 비울 수 있어.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