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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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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ey Feb 06. 2024

구판 해리포터 시리즈와 아기의 전집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1평을 갖는 일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한동안 하교 후 날마다 친구의 집으로 갔다. 당시 친구의 엄마는 독서논술 선생님이셨고 집에 책이 많았다. 매일 친구네 집으로 출근하며 내가 열심히 읽었던 책은 문학세계사의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전집.(기억이 어렴풋해 찾아봤다.) 너무 재미있어서 날마다 가서 읽고, 빌려와서 또 읽으며 시리즈를 끝까지 다 보았다. 친구네 집에 책을 두고 오는 게 너무 아쉬웠고, 빌려온 책을 반납하면서 또 너무 아쉬웠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1999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2000년대 초반을 초등학생으로 보낸 나는, 명실상부 해리포터 키즈다. 초등학생 신분으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읽기 시작해서 고등학생이 되어 마침내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로 끝을 보았다. 사실 우리 집에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가장 친한 친구가 같은 해리포터 덕후(!)였고, 친구의 부모님은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될 때마다 사주셨다. 그 덕에 매번 친구가 다 읽고 난 후 편안하게 빌려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똑같이 생각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 내가 소장해야 하는데.

사실 완결을 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놀러 다니며 신이 난 20대가 관심과 에너지를 쪼개어 학창 시절에 읽던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누어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보다 멋들어진, 있어 보이는, 어른 같은, 읽히지도 않는 책들을 읽으려 노력했다.



사역을 했던 교회에서 바자회를 열었다. 많은 성도님들이 깨끗하고 좋은, 그러나 더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내놓았고 열심히 닦고 전시했다. 여러 부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료도 만들고, 전도 부치고, 팔찌도 팔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잡화 옆에 쌓여 있는 해리포터 전집이었다. 홀린 듯 다가가서 하나하나 들춰보니 마법사의 돌부터 죽음의 성물까지 전 권이 다 있었다. 물론 구판으로. 가격은 2000원이었다. 전 권이 2000원이라고? 망설일 필요도 없이 "제가 살게요!"를 외치고는 꾸역꾸역 쇼핑백에 책을 모두 넣어 집으로 가지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쉬는 날 하루 집에 박혀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정주행 하며 읽어야지!'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주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신혼집이었던 노들역의 낡은 주택은 두 명이 살기에 넉넉했고 해리포터 시리즈를 책장 한 군데 당당히 꽂아둘 수 있었다. 그러나 평수를 줄여 이사 간 성남의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대다수의 책을 처분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쇼핑백에 쌓여 베란다로 내몰렸다. 그렇게 베란다에서 잠을 자다가, 올해 초 의정부의 행복주택으로 함께 넘어왔다. 더 줄어든 평수에 쌓여 있는 짐은 어떻게든 처분해야 했고, 자연히 지현의 눈에는 해리포터 시리즈가 거슬렸을 것이다. 한두 권도 아니고 전 권을, 도대체 왜 보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는가. 그는 그렇게 근본적인 질문을 했고,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고집스럽게 싫어! 안 버려! 하고 말았고, 그는 포기했다. 그렇게 여러 번에 걸쳐 많은 책들이 처분되는 동안에도 해리포터 전집은 여전히 작은 방 책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실 본래가 책 욕심이 많기 때문에, 그냥 욕심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에게 시리즈물, 전집에 대한 환상과 로망, 집착, 갈증 그 비슷한 결의 마음이 있는 듯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될 것을, 굳이 굳이 사모은 책들이 있다. 유유 출판사의 땅콩 문고나, 반니 출판사의 산문선, 푸른 숲 출판사의 디아더스 같은 시리즈들. 사 모으는 기준은 없다. 그냥 내 마음이다. 앞서 언급한 시리즈들도 아직 책장에 전체를 다 가져다 놓지 못해 아쉽지만, 동거인의 눈치를 보며 수집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그렇게 나의 전집 구매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아기의 책으로 그 에너지가 넘어갔다. 돌이 가까워지니 슬슬 전면 책장과 아기의 책을 사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책 쇼핑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찾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첫 책들은 대다수 찢어질 것이 뻔하여 당근 마켓에서 최대한 상태 좋고 괜찮은 책들을 시리즈, 전집으로 구매했다. 가져온 책들을 다 꺼내어 꽂아줄 만한 공간이 없어서, 작은 방 옷장 구석에 자리를 마련해 두고는 몇 권씩 돌아가며 전면 책장에 꺼내주고 있다.



사실 내가 어릴 때도 우리 집에 전집이 있었다. 60권 세트 동화 전집. 전집은 텔레비전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다. 나와 동생을 위해 엄마가 새 책으로 사주었던 그 동화 전집을, 우리는 읽고 또 읽고 낡을 때까지 읽었다. 테이프도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지금까지도 그때 보았던 동화의 몇몇 그림이나 테이프의 대사들이 순간 기억으로 스쳐갈 때가 있다.


청소년기를 지나며 우리 집에 전집이 없는 이유는 단순히 책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가정을 꾸리고 나에게 주어진 공간을 돌보며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 전집이 없었던 이유는 놓을 공간이 없어서였다. 둘이었던 아이가 넷이 되고, 네 명이었던 가족이 여섯 명이 되면서 단순히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건만으로도 집이 꽉 찼던 것이다.


시리즈물과 전집을 놓기 위해서는 책을 살 돈뿐만 아니라 책을 놓을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공간 또한 보이지 않는 돈이다. 매매, 전세, 월세 어떤 형태로든 우리 집의 공간은 평당 금액으로 환산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만한 경제적 가치를 가진 1평에 무엇을 놓아야 효율적일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가진 공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효율성을 고민하며 끊임없이 물건을 들였다가, 보내는 삶. 집이 좁게 느껴져 답답할 때마다 책장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어떤 책부터 처분할까 고민하는 삶.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전집 하나 마음 편히 들이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무력감이 들었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여느 젊은 부부들이 그러하듯 전략적으로 좁고 저렴한 공공임대 주택에 들어왔다. 그리고 근 몇 년 안에 공간의 효율성을 따지지 않고 마음껏 전집을 꽂아놓을 수 있는 1평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치열하게 살고 있다. 희망을 거두기에는 내가 너무 젊다. 아기가 자랄 때마다 원하는 전집을 꽂아둘 만한 1평을 곧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굳이 고집스럽게 보관해 온 구판 해리포터 시리즈 전집을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서 10대가 된 아기와 함께 고구마를 까먹으며 읽을 날이 올 것이다. 현실적이고도 이상적인, 그런 꿈을 꾸며 나는 오늘도 눈에 불을 켜고 당근마켓에 판매할 물건을 찾는다. 책장 한쪽에서 존재감을 내뿜는 해리포터 시리즈와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아기의 전집에는 억지로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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