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닿을 수 있어 더 외로운 아이러니
영화 '청설'
‘라떼’는 여고생이 군인들에게 무작위로 위문편지를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국군 아저씨(지금 생각하면 꼬맹이 중에 꼬맹이)께…’로 시작하는 그 편지에는 아무 말이 난무했는데 예를 들면 GOD가 너무 좋다거나, 기말고사를 망쳤다거나, 친구랑 싸웠다거나, 선생님이 좋다거나 뭐 그런 거. 그런 아무 말에 외로운 국군 아저씨들은 착실히 답변을 보내오기도 했다. 무작위로 보낸 편지를 받아 든 한 군인 아저씨는 누군지도 모르는 부산의 여고생인 내게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군인과의 펜팔이 시작됐는데…
H.W라는 이니셜을 쓰던 박찬호 선수를 닮았다던 그 군인오빠(사진 미확인)와 두근두근하며 편치를 수차례 주고받았다. 나는 J.M.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가 오고 갔으려나. 나는 유행하던 시도 옮겨 적어가며 편지를 채웠고 보내고 나면 하염없이 답장을 기다렸다. 나름 필력이 좋았던 기억인데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린 마음에 그 글이 좋아 여러 번 읽어 내렸다. 대단한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순수했고 꽤 진지했다.
어느 날 이니셜에 걸맞은 서로의 이름을 유추했는데 둘 다 땡. 내가 예상한 그의 이름은 현우, 그가 예상한 나의 이름은 정민. 알고 봤더니 그는 외자였다. 서울에 놀러 오면 얼굴을 보자고, 전역하면 부산으로 놀러 오겠다고 했지만 그는 전역을 하고 나는 고3이 되면서 자연스레 편지가 끊겼던 것 같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부산과 서울은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쯤은 아마도 배 나온 그저 그런 아저씨가 되어있을 H.W라는 이니셜을 쓰던 군인아저씨가 가끔은 궁금하다.
편지의 매력은 자고로 기다림이지 않을까. 상대방의 답장이 궁금하고 두근두근하며 기다려지는 그런 마음 같은 거.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잠시의 틈도 참지 못하는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되지 않는 그 시간들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든 문자든 다양한 메시지 플랫폼을 통해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도 있지만 의미 없는 문자들만 난무하고 맥락 없는 대화들만 수십 개씩 쌓여있는 단톡방을 보면 더 외로울 때가 있다. 전화는 무료로 요금 걱정 없이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는 시대지만, 요즘은 용건 없는 전화를 거는 것도 받는 것도 어색하다. 언제든 닿을 수 있어서 더 외로운 아이러니.
동명의 대만 영화를 리메이크한 한국 영화 ‘청설’은 청량함과 설렘이 가득한 보기 드문 무공해 로맨스 영화다. 대학생활은 끝났지만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용준’은 엄마의 등쌀에 떠밀려 엄마를 도와 도시락 배달 알바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수영장으로 도시락 배달을 간 용준은 수어로 동생과 대화하고 있는 ‘여름’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대학 때 배운 수어를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용준은 수어를 활용해 여름을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앞뒤 재지 않고 용감하게 마음을 전한다. 손으로 마음을 전하고 떨림을 느끼는 그들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누구보다 더 잘 보고 느낀다.
도파민 과잉 시대에 우리에게는 말의 틈과 공백, 기다림과 같은 ‘낭만’과 ‘순수’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