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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일대를 걷고 싶어지는 날

영화 '미망'

by Ellie


기본적으로 길치이자 방향치인 내게 서울은 넓고도 어려운 곳이었다. 가끔 택시를 탈 일이 있는데 택시에 타서 기사님이 목적지를 물으면서 “어디로 갈까요”하면 “내비대로 가주세요”하거나 “기사님이 아시는 빠른 길로 알아서 가주세요”했다. 무슨 길이 빠른지는커녕 강남강북도 모르겠고 일산이 어딘지 분당이 어딘지 남양주가 어딘지 광명이 어딘지 동서남북 분간 못하는 사람이었다.


겨우 지하철노선도 하나에 의지해서 내 방식대로 서울과 친해졌다. 방향을 몰라서 버스 타기가 무서웠고 요즘처럼 버스앱이나 지도앱도 없던 시절이라 버스를 잘 못 탔다. 버스 타면 한 번에 갈 곳을 굳이 지하철을 갈아타고 가기도 했다. 너덜너덜해진 나만의 지하철 노선도를 두고 온 날이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새로운 지하철 노선도를 지하철 매표소에 비치해두고 있긴 했지만 나만의 표시를 해둔 손에 익은 지하철 노선도는 나만의 애착템이었다.


광화문에서 명동에 가야 할 때면 광화문역에서 5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간 뒤 4호선을 갈아타고 명동역으로 갔다. 광화문에서 인사동을 가야 할 때면 역시나 광화문역에서 5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에 내려 3호선을 갈아탔다. 종로나 을지로 같은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광화문을 기준으로 명동이며 인사동 같은 곳들이 버스나 도보로 더 합리적으로 금세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걸, 내가 지하철 밖에 모르는 얼마나 미련한 인간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 이후로는 광화문을 기준 삼아 서촌이며, 삼청동이며, 인사동이며, 종로며, 을지로며, 명동 같은 곳들을 부리나케 싸돌아다녔다. 편한 신발과 적당한 날씨, 평균 정도의 컨디션, 적당한 배부름 혹은 취기가 함께하면 어디를 걸어도 꽤 좋다. 쾌청한 공기와 좋은 대화상대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다.

‘광화문 로맨스’라는 소개가 달린 영화 ‘미망’은 미망이란 단어가 가진 세 가지 뜻을 주제로 세 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迷妄)’, ‘잊고 싶지만 잊을 수가 없다(未忘)’, ‘멀리 넓게 바라보다(彌望)’라는 세 가지 소제목으로 구성됐다.

등장인물은 이름이 없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여자’는 과거 연인이었던 ‘남자’를 우연히 종로 어딘가에서 재회한다. 전 연인과의 우연한 만남, 어색한 대화가 이어지다 악수를 하고 헤어진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모더레이터로 일하는 ‘여자’는 종로에 위치한 한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다. 폐관을 앞둔 종로극장에서 진행된 행사를 끝내고 행사 후 이어진 뒤풀이에서 빠져나온 뒤 집으로 향하는데, 한 행사 관계자가 따라 나와 그녀를 붙잡고 호감을 표한다. 일종의 고백으로 시작된 둘 사이의 대화는 줄타기를 하다 둘은 지하철 역을 앞두고 헤어진다.

이어진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계절이 겨울로 지났고, 시간도 흘렀다. 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과거의 연인과 또 다른 친구.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옛날을 추억하기도 하다 과거의 공간인 광화문의 한 술집으로 향한다. 각자의 사정으로 또다시 자리를 파하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변했고 또 어떤 건 변하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 나가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감정의 잔여물을 남겨 둔 채 돌고 돌아 조금씩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걷다 보니 가끔은 할 일 없이, 목적지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낭창낭창 걷고 싶은 날이 있다. 길을 잃어도 좋다. 목적지가 없으니 길을 잃는다는 말도 어찌 보면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길이 없으면 돌아 나오면 그만이고 길이란 어떻게든 통하게 되어 있기 마련이니까. 어쩐지 느릿느릿 광화문 일대를 걷고 싶은 날, 이 영화를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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