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페이스’
태어날 때부터 키가 컸던 나는 학창 시절 키에 관한 별로 좋지 않은 추억들이 많다. 키가 크면 좋은 말로 성숙해 보인다, 한 마디로 늙어 보인다는 게 어릴 적 가장 큰 고민이었다. 키만 컸지 낯가림이 심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이 가장 싫었다. 특히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려워 가끔씩 발표할 일이 있으면 달달 떨리는 모기 목소리로 기어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늘 선생이란 사람들은 ‘등치(덩치)는 산만한기 안 어울리게 목소리가 다 기어들어가노’ 했다. 한창 예민하던 시기에 ‘덩치’라는 단어가 얼마나 큰 상처이자 스트레스였는지 말도 못 한다. 큰 키가 싫어서 부러 몸을 더 움츠리고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키가 더 클까 봐 줄넘기도 안 하고, 신발도 딱 맞게 신고 다녔다. 발이 크면 키가 더 클까 봐, 줄넘기를 하면 성장판이 자극되어 키가 더 클까 봐. 그땐 이른바 ‘포켓컬’ 이미지의 작고 아담한 친구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그러던 내게 큰 키와 이른바 ‘노안’이 도움이 되었던 한 사건이 있었으니 때는 바야흐로 2001년. 영화 ‘친구’가 개봉했던 때다. 당시 영화 ‘친구’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너 나 할 것 없이 영화 대사를 따라 하기에 바빴다. 나는 당시 무시무시한 고3. 공부한다고 정신이 없어 개봉하는 영화 따위는 아무렴 어땠을까 싶지만 센세이셔널한 영화 ‘친구’를 보고 싶어 다들 안달이었다. 심지어 그 영화를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위치한 범일동에서 촬영했던 터라 내적친밀감이 말도 못 했다. 영화를 찍으러 온 배우 장동건과 유오성 배우를 보고 싶어 촬영이 한창이던 당시 주위를 기웃대며 저기 멀리서 뒤통수라도 보고 온 날은 학교 친구들에게 ‘나 장동건 봤데이’라고 소리치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도 보고 싶어 죽겠는데 가장 큰 난관은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점이었다. 일단 영화 티켓을 사는 일부터 큰 난관이었다. 고3 당시에 내 키는 이미 170cm를 넘었고 누가 봐도 대학생이라기에 큰 이견이 없었다. 1년 전쯤이었나. 두발자유화(두발자유화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선지)가 되면서 귀 밑 3cm의 단발머리를 길러 긴 머리였기에 겉모습만 봐서는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내 노안이 이럴 때 빛을 발휘할 줄이야. 나는 파워 당당하게 영화 티켓을 끊었다. 콩닥콩닥하며 긴장된 목소리로 “친구 2장 주세요” 정도의 말을 했겠지. 누가 봐도 성숙미 넘치는 노안의 내게 태클을 걸지 않았다. ‘앗싸, 성공.’ 친구의 티켓까지 2장 예매에 성공한 뒤 당당하게 관람에도 성공했다.
‘별 거 아니구먼.’ 아, 그리고 영화 진짜 재밌네!’
영화 ‘친구’ 관람에 성공한 뒤 나는 친구를 본 이야기를 아마도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얘기하고 다녔던 것 같다. ‘어떻게 예매에 성공했냐’, ‘입장하는데 안 걸렸냐’ 등 아이들의 쏟아지는 질문 세례가 이어졌지만 ‘고마해라. 마이 무따이가’를 실감 나게 내뱉으려 노력하며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 아부지한테 부탁해 보등가’라며 으스댔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일부의 친구들은 내게 대리 티켓팅을 부탁하기도 했다. ‘나도 표 함만 끊어도’라며 아양을 떠는 친구들에게 ‘마, 함 해줄께’라며 선심을 썼다. 청불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에 800만을 넘는 관객을 동원했는데, 아마도 나 같은 고딩들이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20년도 더 지난 옛날 얘기를 꺼낸 건 오랜만에 본 청불(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덕분이다. 영화 ‘히든페이스’는 남녀 주인공 3명의 얽히고설킨 욕망을 다룬 영화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성진(송승헌 배우), 첼리스트이자 성진의 약혼녀인 수연(조여정 배우)은 연인 관계로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경제적으로 탄탄한 수연네 덕분에 호화로운 신혼여행, 멋진 대저택에서의 럭셔리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느 날 수연이 영상 편지만을 남겨둔 채 자취를 감춘다. 그녀의 행방을 쫓던 중 수연의 소개로 등장한 후배 첼리스트 미주(박지현 배우)에게서 성진을 강한 끌림을 느낀다. 번드르르한 삶을 벗어날 용기는 없지만 경제력 차이에서부터 시작된 묘한 자격지심과 일종의 권태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성진은 그녀에게 빠르게 빠져들고 만다. 여기서 그친다면 흔한 치정 멜로영화에 그쳤겠지만 영화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 모든 걸 집 안의 밀실에서 다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수연이다. 이른바 밀실 격정 서스펜스 멜로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가 있었다.
이 영화 야하고 재밌다. 야한 맛(?)에 봐도 좋지만, 야하기만 하지 않고 재밌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귀하고도 재미난 성인용(?) 오락영화의 귀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