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잊지 말아야 할 지혜
허리는 굽어있다. 느릿느릿 절뚝거리는 걸음거리에 생명력과 활기라곤 거의 찾아볼수 없다. 희끗희끗한 백발과 검은 머리가 섞여서 쪽진 머리에 그나마 적은 숱때분에 허연 두피가 노출되있고 눈썹과 속눈썹도 옅은 갈색에 가깝다. 눈동자는 빛나기보다 탁하고 얼굴에는 굵고 자잘한 주름이 그야말로 자글자글하다. 얼굴 뿐만 아니라 팔과 손등에 뒤덮인 검버섯이 눈에띈다. 누군가 검버섯을 생을 마감할 때가 다다른것을 알려주는"죽음의 그림자"라고 했던가.
우리 교회에 최장수 노인이신 90대(90세 이후에는 나이를 여쭤보지 않았다) 할머니 권사님의 모습은 힘없고 연약하면서도 여유롭고 자애롭다.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심에도 마주치는 사람 하나하나를 너는 누구냐고 물어보고 손을잡고 축복해주신다. 내면은 젊어서 성실하고 정직하고 사랑이 많으신 모습 그대로지만 겉모습은 누가봐도 위태위태하고 가녀리다. 과연 이 모습이 우리와 아주 동떨어진 모습은 아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드리우고있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약해지고 병들고 죽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애는 한참인듯 하지만 찰나이고 또 마지막이 언제인지는 그누구도 알 수 없다. 위의 사실이 기정 사실, 진리라 해도. 나는, 나에게만은 동떨어진 이야기인거 같다. 더군다나 20-30대의 건강한 청년이라면 "늙어감", "병듦","죽음"이 멀게만 느껴지는건 사실이다.
고대 로마인은 죽은 사람을 'Vixit(다 살았다)'이라고 불렀다.
볼리비아의 레이비족은 사람이 죽으면 '고추재배하러 갔다'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피하려 든다.
우리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는 커녕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여긴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행동이다. 나에게도 죽임이 어떤 의미이며 나에게든 주변사람에게든 죽음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내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기조차 두렵고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그 의미가 너무 깊고 심오해서 설명하기 어려웠던걸까?
내가 처음 장례식에 가본건 5살,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다.
90년대 초반이었던 그때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더 일반적이어서 우리집은 전국 각지에서 친지들과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았는지 기억조차 안나지만 함께 사시고 나를 귀여워 해주시던 인정 많으신 할아버지가 몸이 원래 편찮으셔서 쉬기위해 더 좋은곳으로 가셨다고 생각했던거 같다. 나는 또래 친척아이들과 놀기에 바빳고 그렇게 슬프진않았다.
두번째는 20살때 친할머니의 장례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다르게 돌아가시기 한두달 전까지 정정하셔서 텃밭에 야채도 손수 키우시고 걸음걸이가 항상 빠르고 경쾌했다. 그러던 어느날에 장롱 높은 곳에 물건하나 꺼내신다고 혼자 올라가신 의자에서 떨어져 고관절이 골절되셨고, 이후로 거동과 식사를 못하시더니 금새 많이 약해지셨다. 날이 갈수록 생명력이 떨어지는게 보였고 어느날 밤에 깊은 잠에 드셔서 일어나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더이상 이세상에 안계신다는 생각에 이때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2남 4녀 중 장남이셔서 손님맞이와 장례를 다 치러내야 했던 아버지가 병원 장례식장에서 한밤중에 몰래 흐느끼시는 모습을 보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이 깊이 와닿았다. "엄마, 이제 엄마도 아부지도 없이 이세상에 나 혼자잖아 ...(지금도 눈물이 난다)"
좋은 죽음이란 어떤 죽음일까? 내 가까운 가족이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평온하고 조용하게 가셨던거 같다. 반면 내나이 21살때 대학교 졸업동기인 선배가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급작스런 오토바이 사고로 즉사했다. 젊고 건강했던 청춘이 하루아침 이세상 사람이 아닌거에 대해 어이가 없었고 장례식에 가서도 실감이 안났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완 다른 아픔이었다. 참으로 아깝다 그 좋던 인생. 잠깐만, 인간의 생명은 모두 존엄하고 소중한데 나이들어 살만큼 살고 죽으면 괜찮고, 젊은 나이에 죽으면 아까운건가? 잠자듯 조용하게 가면 좋은 죽음이고 불의의 사고로 또는 질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다 죽으면 나쁜 죽음인가?
고개를 돌리지마라, 너희도 이와 같을지니라.
죽음을 자주 떠올리고 익숙해지도록 하자.
죽음에서 그 기이함을 없애버리자.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의 저자는 죽음이 다가올 때의 실질적인 상황과 그 때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관계 등의 변화에 대처할 방법에 대해 생생하고도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로 죽음을 간접 체험하게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지 난생처음 깊이 경험하고 생각하게한다. 나 또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은 어떨까? 읽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지고 시도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죽음을 상고하는 과정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깊이있고 가슴저린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노인과 병든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할 기회가 많았다. 이전에 7년간 재활병원에서 신경계 손상 환자를 치료하는 치료사로 근무했고, 병들고 약해진 환자들을 매일매일 재활운동에 참여시키고 대화도 나누며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수 있었다. 지금은 하는 일이 연구분야로 바뀌었지만 재활이 필요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기때문에 종종 만나고 대화할 기회가 있다.
재활병원의 환자들은 아픈환자들이지만 다른 병원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재활을 통해 아픈몸을 회복시키고자 병원을 찾았기때문에 삶에대한 의지와 활기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환자들을 통해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 중에는 뇌졸중 편마비 환자가 대다수이고, 척수손상으로 인한 하반신 (또는 손상레벨이 상위일수록 상지와 몸통을 못쓰기도 함)마비 환자, 기타 뇌질환 환자(모야모야 병, 다발성 축삭 경화증, 외상성 뇌손상 등등)가 있다. 연령대도 20대에서 80대 이상까지 다양하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뇌졸중 편마비환자는 대부분이 50대 전후의 남자가 많고, 요즘은 20-40대도 늘어나는 추세다. 두번째로 많은 척수손상 환자는 불의의 사고 또는 낙상으로 발생하기에 젊은사람들이 많고, 척추뼈가 골절되며 안쪽에 위치하는 척수가 손상되어 손상레벨 아래의 몸이 마비되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재활 환자들은 나이가 적고 많고간에 약하고 통제 안되는 신체(팔다리)가, 언어장애로 어눌해진 발음이, 절뚝거리는 걸음거리가 이들의 마음을 약하고 무너지게 한다. 과거에 자신만만하고 가진 것이 많았던 사람일수록 한순간에 환자가되버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내 또래나 그보다 더 어린 환자들은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날들이 너무나도 두렵다. 이렇듯 우리의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한순간에 병들어버리기도 한다. 지난 7년간 날마다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였다. 아파도 병들어도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나는 존재하고 생각도하는데 신체가 약해지면 정신은 따라서 약해져버린다. 신체와 정신은 하나인걸까? 일부 환자들은 뇌 손상 부위나 손상정도에 따라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판단과 사고를 잘 하지 못하기도 하고, 생전 보이지 않던 엄청난 폭력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환자들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걸까?
나에게 유독 생각나는 환자들이 있다. 낙상(떨어져 넘어짐)으로인한 경추(목뼈)골절 척수손상으로 목아래로는 감각도 운동기능도 없는 60대 후반의 남성분 이셨다. 이분에게 할 수 있는 거라곤 누워서 고개를 약간 들거나 옆으로 돌리기, 있는 힘을 다해 팔 조금 들어올리기 정도였고, 복부를 포함한 몸통 근육이 마비되어 혼자 앉아있기도 힘들었고 당연히 대소변 기능이 떨어져 소변줄을 차고다니셨다. 워낙 말수가 적으신 분이라 이야기를 많이 나누진 않았지만 어느날은 컨디션이 많이 안좋은바람에 재활운동을 할수 없었기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날 자기가 살아온 인생여정과 함께 지금 자신이 느끼는 심정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하셨다. 평생 장교로 남들 앞에 위엄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왔고, 오늘따라 몸은 더 통제되지 않고 호흡조차 마음대로 하기힘든 상황이었지만 의외의 말이었다. "두번 다시 오지않을 오늘에 감사하고,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기.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참으로 나태하고 불만으로 하루를 살아가던 나에게 많은 반성을 하게한 큰 스승이셨다.
또 다른 한분의 환자는 VIP병동에 근무하던 때 만난 30대 후반의 뇌종양 환자였다. 나중에는 암세포가 뇌전체에 전이되면서 뇌에 물이 차고 뇌압이 높아져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남편분이 가끔 문병을 왔고 딸얘기도 가끔 하셨는데 어찌나 밝고 쾌활하신지 치료실에 내려오실때마다 모두가 알수 있게 우렁찬 반가운 인사를 하셨더랬다. 하루에도 몇번씩 가장 많이 하는 멘트는 "감사합니다 선생님"이었다. 초반에는 잠깐 서있을 수도 있었고 농담도 잘하고 수다쟁이였던 분이, 점덤 눈도 안보이고 손발에 불수의적으로 떨림 현상이 자주 심하게 있었고, 얼굴 빛이 누렇고 검어져갔다. 나중에는 아예 눈도 보이지 않고 병동에서 침대에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몸에는 뼈와 가죽만 남았지만, 유독 나를 좋아해주셔서 "선생님 오셨어"하면 한번씩 꼭 환하게 웃어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알고있었고 그 모습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드리운다는 말을 실감나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에 상태가 악화되어 대형병원으로 옮겨가시다 끝내 숨을 거두셨다. 이 분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얼마나 맑고 따듯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셨는지 함께하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순간 신체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작고 야위어갔지만, 그분의 내면은 항상 생생하게 살아있어 나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내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근무했던 경험은 나에게 특별했고 또 가치있는 교훈들을 남겨주었다. 누구든 어느 순간에나 약해지고 병들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고 병이들면 많이 배웠든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명예나 생김새나 자랑거리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린다는것. 그렇기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같이 느껴져도 건강한 몸이 있다는것과 살아갈 오늘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것. 또한 죽어가는 순간에도 인간의 내면과 가치는 존엄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내심 상처받을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것을 잃게하고, 또한 더이상 두려워 할게 없게 만든다.
그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인간적 두려움, 남들의 시선, 자존심, 체면, 질투 따위가 실은 별게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잃게 될 것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의 심장은 더 이상 자제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겹게 겨우겨우 살아가는 또는 즐거움에 취해 살아가는 인생의 순간은 짧고, 죽음으로써 이 모든 것을 모두 잃게된다. 여기에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할 솔로몬의 교훈이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지나치게 조바심낼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자신만만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또한 죽은이의 형상이나 유품으로 죽은이를 추억하며 동시에 우리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이 있다. "메멘토 모리(그대는 죽어야 할 운명임을 기억하라)"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취약성이 인생을 가치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덧없는 인생이지만 가장 찬란한 것이 인생이며, 영원하지 않기에 가장 고귀한 것이 인생이다.
죽음으로 삶을 새롭게 보게 되더란 말입니다. 세상 만물이 전보다 더 사소하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합니다. 사실 사소하고 중요한 것의 차이는 별것이 아닙니다. 다만 눈에 들어오는 만물의 순간순간의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현재를,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온전히 바라본다면 감탄이 절로 나올겁니다!
지하철 환승 통로에 인생들이 제각각 바쁘게 지나다닌다. 어떤사람은 매력적인 외모에 표정도 자신감에 차있고, 어떤사람은 걸친 옷도 후줄근하고 인생의 시련은 다겪은 찌든 얼굴이다.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 천천히 지나가고, 등이 굽은 노인도 있다. 이 모든 인생들이 얼마나 제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지, 또한 이들도 예외없이 죽음앞에서는 모두 평등할 것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만의 빛을내며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는 소중하고 찬란한 인생 하나하나를 바라본다.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는 것은 삶을 훨씬 달콤하게 만든다.
죽음을, 삶을, 이에 대한 가치를 생각해보는 것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준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오늘의 삶을, 지금 이 순간을 깊이있게 살아가게 하는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