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혼집은 9평짜리 빌라

by 찌지링

한 번은 업무 때문에 알고 지내던 분이 나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겠다며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집이 아닌 회사로 보내달라며 회사주소를 알려준 적이 있다.

당시 난 주로 재택으로 일했기 때문에 일부러 회사에 나가야 하는 게 번거로웠지만

그 번거로움보다 일적으로 알게 된 상대가 우리 집 주소를 아는 것이 더 싫었다.

창피하게도 아파트가 아닌 빌라에 사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불쑥 대면하는 순간이 오곤 한다.

직장동료가 우리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고 할 때,

사람들이 한 번도 못 가봤으니 우리 집에서 모임을 하자고 할 때,

그리고 일적으로 만난 상대에게 우리 집 주소를 밝혀야 할 때가 그랬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내가 손쓸 새도 없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고

그럴 때마다 가장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결혼준비를 하며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땐 10년 원룸생활을 청산한 것만으로도 좋았다.

비록 거실과 부엌의 경계가 없고, 방도 화장실도 아주 좁은 집이지만 집 안에 문이 3개나 달려있다니!

서울생활 대부분을 화장실 문 하나 달린 원룸에서 지냈던 나에겐

방이 2개나 있고, 침실과 분리된 거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지은 지 얼마 안 된 신축이라 건물이 깨끗했기 때문에

처음엔 내 취향에 맞는 가구들을 고르고 배치하며 신혼집을 꾸미는 재미를 맛보기도,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을 불러 소소한 집들이를 즐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곳에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연다는 사실이

'신혼이라도 소형아파트에서는 시작해야지',

'앞으로 집값 계속 오를 테니 아예 처음부터 빚내서 집을 사',

'그래도 남자 쪽에서 아파트 전세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라는 주변의 소리보다

더 크게 내 마음을 지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은 자꾸 사람들의 말을 따라 흘러갔다.

'거기 집값 완전 비싼데 거기로 이사 간다고? 완전 부럽다!'

서울 중심가나 핫한 신도시에 사는 지인을 향한 주변의 말들,

'거기가 집값은 싼데 주변 환경이 너무 별로라 애 키우는 데 안 좋잖아. 그래서 부모님이 거기선 살지 말래'

내가 어느 지역에 사는지 모르고 의도치 않게 내가 사는 지역을 깎아내리는 말들,

'너네 집은 계속 살 사람들이 아니라 이사 가려는 사람들이 잠깐 사는 곳이잖아'

평소에도 팩폭 잘 날리는 친구의 직접적인 어퍼컷까지 내 마음을 강타하면서

어느새 나는 어렵게 마련한 우리의 보금자리를 부끄러워 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 부끄러움은 어떤 부끄러움일까.

30대가 될 때까지 집값을 충분히 모으지 못한 나와 남편의 무능력에 대한 부끄러움?

결혼한 자녀들에게 집 한 채 해주지 못하는 우리 부모님들의 무능력에 대한 부끄러움?

그 어느 쪽도 아니기에 이 부끄러움에는 정체성이 없음을, 거짓된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부부가 앞으로 더 좋은 보금자리에 살 수 있길 바라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계속 부끄러워하고 싶지가 않다.


우리 동네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이렇게 아무 때나 와서 조용히 글을 쓸 수 있는 멋진 도서관이 있고,

밤마다 남편과 수다 떨며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도 있고,

우리 집 빌라 바로 옆엔 원두에 진심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어서

집 앞을 오갈 때마다 고소한 원두향을 맡을 수 있고, 아무 때나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삿날, 끝없는 가구조립을 마치고 같이 치킨을 시켜 먹었던

남편과의 추억이 우리 집엔 있다.

이렇게 내가 잘 알고 있는 일상의 행복들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 올라오는 부끄러운 마음은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지만 세상이 만들어낸 가짜 부끄러움에 침식되고 싶지 않고 또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집에 관한 것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세상은 가끔

내 잘못도 아닌데 스스로를 초라하고 부끄럽게 여기라, 속삭일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럴 때 무수한 세상의 말들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겪는 일상의 진짜 행복을 주시하는 것.

그것이 세상이 나에게 잘못 꽂은 화살을 빼낼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9평짜리 작은 신혼집에서 살며 나는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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