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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지링 Mar 18. 2024

Q8. 엄마에게 '신연호여사님'이란?

Q. 엄마에게 '신연호여사님'이란?


나의 시어머니, 신연호여사님.

1935년 9월 26일생, 돼지띠, 지금 살아계시면 90세.

홍천 반곡리 부잣집 외동딸이셨는데 어머님께 전해 듣기로는 6.25 때 여동생이 사망했다고 한다.

엄마마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들어오면서 시집을 빨리 오게 되었다고 했다.

시어머니도 장손며느리로서 일이 많으셨는데 남편인 아버님마저 어머님 34세 때 4남매를 남겨놓고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더운 여름날 수박을 드시고 체하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그다음 날 서울로 급하게 병원을 옮기시다가 가평쯤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그때에 차창밖을 내다보니 코스모스가 하늘하늘거렸다고 말씀하셨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나도 눈물이 왈칵 나왔었다.


시어머니는 계산도 빠르고 일본말도 잘하셨다.

내가 결혼했을 때 어머님은 48세, 며느리인 나는 24세였는데 어머님은 시장에서 식품 장사를 하셨고, 살림은 전적으로 내가 맡았다. 어머니의 아침, 저녁 식사는 며느리인 내가 가게로 해 날랐고, 아침 장사도 같이했다. 

1985년~1995년까지는 장사도 잘되었고 그로 인해 여름이면 고구마줄거리, 도라지를 까느라 내 손도 시커멓게 물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한테도 늘 생선냄새가 났다.

그렇게 각종 건어물, 야채를 팔며 쉴 틈 없이 장사를 하시어서 자식들을 모두 고등학교, 대학까지 공부시키셨다.

무엇이든 더해주고 싶고 내 육신은 힘들어도 자식은 평안해야 한다는 신념하나로 열심히 사셨다.

우리 어머니의 삶도 책으로 몇 권을 써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도매장사가 들어서고 대형마트들이 생기면서 장사가 잘 안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머리가 아프시다고 집에 들어와서 대굴대굴 구르시며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런 모습을 몇 번 본 기억이 나서 그 길로 시내의 한 내과로 모시고 갔다.

의사가 이상하다고 소견서를 써줘서 대학병원으로 갔는데 바로 입원을 하라고 했다.

결과는 뇌수막염. 앞머리 부분에 큰 물혹이 있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장사를 정리했고, 한 달간 입원을 하신 후 5년 동안 약을 드셨는데 그로 인해 치매도 오셨다. 한 번은 넘어지면서 허리를 다치셨는데 그로 인해 건강이 더 악화되셨다.

일찍이 남편을 잃어 가장이 되었으며 사 남매 예뻐하고 사랑해 줄 시간조차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시다 행복해야 될 노년을 연약한 몸과 치매 증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


시어머니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20여 년을 함께 살았는데 그중 6년 정도를 목욕도 시켜드리고, 소변, 대변을 갈아드린 걸로 기억한다.

여자의 일생으로는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한 인생이지만 엄마로서는 책임감이 강했고 성공한 어머니시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도 사실 많이 힘들었다.

아이들이 초, 중,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머니도 돌봐야 하고 집안의 경조사도 다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는 아예 말씀도 못하셨다.

하늘나라 가시던 날 아침에 식사를 드렸는데 삼키지 못하고 다 토하셨다.

죽을 드려도 아예 넘기지를 못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날 아침 내 손을 꽉 잡으셨는데 힘이 좋으셨다.

그렇게 가시는 줄 알았다면 따뜻한 말이라도 해드렸어야 했는데 너무나 후회가 된다.

시어머니와 나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혼자 사신 분이시라 그런지 조금 차가운 분이셨고 나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의무적으로라도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더 잘해드리지 못하고 편안하게 말 한마디 못 해 드린 것이 못내 아쉬워 한동안 마음이 많이 아팠다.

지금도 남편은 납골당에 계신 어머님께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고 자책을 한다.

맞다. 우리는 불효자다.


내 꿈속에서 어머니는 좋은 곳에 계셨다.

어느 날 꿈속에서 어머니와 캄캄한 밤에 산길 같은 곳을 걷고 있었다.

처음엔 뱀도 나오고 가시덩굴도 있고 그래서 무서운 마음으로 어머니 뒤를 따라갔는데 한참을 그렇게 가다 보니 푸르른 수양버들이 양쪽에 길게 푸르르게 서있고, 날도 아주 아름다운 가을날 같았다.

너무도 예쁘고, 멋있고, 깨끗했다.

'참 좋다'하고 저 멀리 내려다보니 아주 평온해 보이는 아담한 마을이 보였다.

'나도 저기서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님이 그 마을로 사라지셨고 눈 뜨고 보니 모든 게 꿈이었다.

이 꿈은 실화이다. 분명 어머님은 천국에 계실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프지도 말고, 힘든 일도 하지 마시고, 편안하시길 바란다.




엄마의 이 글은 내가 엄마에게 질문을 던지며 예상했던 답변과는 많이 다르다.

내 기억 속에 엄마는 일을 하면서도 할머니 점심을 챙겨드려야 해서 점심시간엔 늘 집에 와서 밥을 차렸고, 매일 할머니 똥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일어서지 못하는 할머니 몸을 부축해 목욕을 시켜드렸다. 

당시 엄마는 힘든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로선 딸 셋을 키우고, 일까지 하면서 치매인 시어머니를 돌보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또 할머니가 편찮으시기 전에 자식들만 끔찍이 여기고 우리 엄마는 일만 많이 시키고, 찬밥신세였다고 듣기도 해서 할머니에 대한 글에는 시집살이로 인한 원망이나 치매 할머니로 인해 힘들었던 일들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을 읽어보니 '엄마에게 신연호여사님이란' 같은 여자이자, 같은 엄마였나 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엄마가 그 누구보다 많이 울어서 어린 마음에 참 이상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야 그때의 엄마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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