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기억을 깎고

by 강비

세수를 하다 문득 연필이 떠올랐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하루키 책에 딸려 온 연필세트를 씻기 전 뜯어보았던 탓이었다. 연필을 쓰려면 연필깎이가 있어야 하는데, 연필깎이가 있었나... 하는 순간. 내 책상 한 구석에 연필깎이가 있던 걸 기억해냈다. 언제나 어지러운 내 방 속에서 십 년은 넘게 있었을, 이제는 다 낡아버린 연필깎이가.


그 연필깎이는 내가 유치원을 졸업하던 날 졸업 선물로 받은 것이다. 맹랑한 곰돌이가 차를 타고 부릉부릉 지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샤파 연필깎이인데, 당시 또래 사이에선 이거 하나만으로도 어깨를 으쓱거릴 수 있는 것이었다. 갓 유치원을 졸업한 어린아이의 눈엔 뭔들 안 멋있어 보였을까. 인파가 거진 빠져나가 한적한 초등학교(나는 병설 유치원을 다녔다)의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서 엄마는 그 '멋있는' 연필깎이를, 정자나무 위에 떠있는 해보다 더 밝은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무척 좋아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엄마에게서 받은 선물이었으니까 좋아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토록 좋아했던 연필깎이는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엄마와 관련된 물건' 중 하나로 전락했다. 엄마와의 추억이 굵직굵직한 소수의 덩어리가 되어 머릿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에도 한계가 없다면 좋으련만 공교롭게도 신은 인간에게 그러한 초월적 능력까지는 주지 못했다.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기억하려 노력하지만 그러기엔 인간은 인간에 불과하고 무한한 기억 저장고는 우리에게 능력 밖의 일이므로 기억들은 서서히 잊히거나 혹은 놓쳐버리고 만다. 절대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엄마의 기일과 엄마의 생일과 같이 엄마의 흔적이 남아있는 숫자로 모든 비밀번호를 바꾸고, 간혹 그 숫자를 되뇌어 보기도 하지만 고작 9년 간 쌓아 온 추억 모두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사진을 보지 않으면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 때도 있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은 시간에 의해 마모된다. 쓸쓸하게도. 한 때는 기쁨에 겨워 하루에 한 번 넘게 바라만 봤던 연필깎이를, 이젠 존재의 유무 조차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내 세월이 담긴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여태 버리지 않은 연필깎이도, 그리고 작은 덩어리가 된 채 남아있는 추억도. 이 글을 마치고 나서 나는 엄마의 연필깎이로 뭉툭해진 연필을 깎을 것이다. 앞으로도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매일같이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간혹. 남아있는 흔적만큼은 결코 버릴 수 없다.

그것이 모든 기억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