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집, 터져버린 배관

조금 손해보며 살지만 마음 편한 삶

by 감성있는 언니

지금 살고 있는 시댁은 서울 강동쪽에 있는 빌라이다.

당시에는 꽤 고급 빌라로 여겨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지나간 세월들을 버틴 흔적들을 가득 담고있는 빌라의 모습이다. 곧 진행될 재건축을 위해 조합도 만들어지며 동네가 꽤 떠들썩하다.


우리가 미국으로 들어오기 얼마 전, 보일러 시스템에 간헐적인 에러가 발생해서 수리기사를 불렀다고 한다.

여러가지 점검을 다 해봤지만 딱히 문제점을 찾을 수 없어 별 소득없이 다시 돌아갔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배관에 아주 작은 크랙이 있어 간헐적으로 에러가 뜰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큰 결함이 아니라 찾기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추운 겨울에 두돌도 되지 않은 아기와 오랜만에 보는 아들네 부부가 추울까 걱정을 많이 하셨을 게 눈에 훤하다.



띵동-


어느 여유롭던 낮 시간, 옆집 사람이 벨을 눌렀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집에 들어와 화장실쪽으로 직행하며 말했다.


"배관이 터진 것 같아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보니 작은 방 벽에 물이 다 샜네요"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어머님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아버님과 통화를 시작했다. 배관 수리 기사를 불렀지만, 날씨가 추워 여기저기 터지는 곳이 많은지 일정을 잡기 어려웠다. 당장 올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나 전화를 돌리며 알아보았고 다행히 와줄 수 있는 분이 있어 기다리기로 했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으로 일찍 하원한 아기를 옆에 두고 놀아주며 다급하게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내가 할 것이 있으면 도와야 할 것 같아 거실에 차분히 있었다. 그리고 아기가 최대한 조용히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배테랑 설치 기사를 운좋게 만난 덕에 보수가 금방 끝났다. 그 과정에서 옆집 여자는 내 옆 쇼파에 앉아 있었고,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물이 새서 작은 방 장롱속에 있던 옷들이 다 젖었고, 벽도 엉망이라고 하며 푸념했고, 우리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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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완료 후 수리 내용을 확인하고 작업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백만원이 넘는 작업 비용, 그리고 도배에 대한 이야기까지, 당연한 순서로 보상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시부모님께선 화재보험에 가입해있었고, 나와 남편은 보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런 경우 자기 부담금을 조금만 내면 보험처리가 가능할 듯 싶었다. 보험사와 연결하여 보상 범위와 자기 부담금 등 세부적인 내용을 듣고, 보험사에서 직접 현장 확인을 오겠다며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tempImageZkUsYQ.heic 터져버린 오래된 배관, 작업 완료 후 확인하는 모습



배관 보수를 하고 약 한 달여가 지났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방에서 쉬고 있던 내 귀에 들린 어머님 전화 소리.


"혹시 견적서는 다 뽑으셨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어차피 보험 처리하면 되니까 조금이라도 피해 입으신 것이 있으시면 다 넣어서 견적 주세요"


옆집은 보험사가 다녀간 지 한참이 됐는데도 아직 견적의뢰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그래도 이렇게 전화를 하는게 재촉하는 모양이 될까봐 저도 안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제가 더 연락 드리지 않을테니 천천히 견적 뽑으시고 다 되시면 연락 한 번만 주시겠어요?"

전화를 끊은 어머님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듯 했다.


얼마 전 이 일 때문에 혓바늘까지 돋았다는 어머님.

편하게 사는 것이 인생 최고라고 늘 말씀하시는 시부모님 스타일대로 이번 사건도 이리저리 재고 따지거나 재촉하는 것 없이 상대 입장에서 불만이 없도록 맞춰주시는 듯 하다.


남편 어린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다고 하셨다.


친구와 청소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얼굴에 큰 상처가 생겼고, 그 상처는 지금도 얼굴을 보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깊다. 하지만 당시 시부모님은 그 친구 부모님께 어떤 보상도, 사과도 받으시지 않았다고 했다. 내 자식이 다쳐서 들어왔다면 난리가 나고 사과라도 받아야 속이 시원했을텐데, 같이 장난치다 그런것인데 어쩌겠느냐 하며 씁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웃으시는 시부모님이다.


반면에 아주버님이 친구와 놀다 상처를 입혔던 때에는 계속 사과를 하고, 모든 보상을 다 해주었다고 했다.

조금 손해볼 지언정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마음 불편하게 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좋다고 말씀하신다.





저번 주, 아버님께서 월급날이라며 보쌈과 막걸리를 사주셨다. 술을 잘 안드시는 어머님께서 옆에서 아기를 봐주시는 동안, 아버님과 막걸리 세 병을 나눠마셨다.


인생을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내 질문에
두 분 모두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답하셨다.

조금 손해보며 사는 것이 멀리보면 더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을 곁들이며.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박한 행복을 자주 느끼며 사는 순박한 시골분들이 우리 시부모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모습들이 누군가는 밋밋하다고, 또는 만만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에는 너무 좋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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