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보내는 여덟 번 째 편지
나아야 드디어 보스턴 사람들이 기다리던 여름이 왔어. 겨울이 너무 길게 이어진다 싶었는데, 막 지루해지기 전 따뜻해져서 다행이야. 매일이 선물같아.
어제는 보스턴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다녀왔어. 보스턴에 막 와서 쌀국수를 먹으러 간 적은 있었지만 차이나타운을 둘러본 건 처음이었어.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새빨간 간판들이야. 중국인들은 빨간색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마라탕을 정말로 좋아하거든. 그래서 올스턴이라는 작은 한인타운에 들러 혼자 마라탕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먹던 그 얼큰하고 알싸한 맛이 아니어서 살짝 아쉬웠어. 차이나타운 간 김에 마라탕이나 먹을까 하다가 가격대가 꽤 높아서 차라리 집에서 만들어 먹자는 결심을 했어. (물가 비싼 미국에서는 모든 걸 다 만들어 먹게 하는 마법이 있어)
그래서 중국 식료품점 구경도 하고 마라탕 소스로 추정되는 것들을(한자를 잘 못 읽어서 ‘추정’해서 사야만 했어) 한가득 품에 안고 집에 왔는데, 어떻게 요리를 해야하나 고민 중이야.
식료품점을 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먹고 사는 것”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거구나. 하버드 자연사 박물관에 들렀을 때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며 공통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먹는 것”이었거든. 옛날이건 지금이건, 추운 지역이던 더운 지역이던 모든 사람들에게 먹는 건 중요한 거니까.
전 세계 베스트셀러인 “H 마트에서 울다” 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 그리움을 한식 요리를 하며 채운다는 내용인데, 추천하고 싶은 책이기도 해. 같은 식재료로 같은 음식을 해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정체성이자 추억이자, 사랑을 말하는 것 같아.
미국에서 영어공부를 위해 공공 도서관 영어수업을 다니고 있는데, 새로운 사람이 수업에 오면 늘 "what is your favorite food?(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를 물어봐. 중동,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전세계 각지에서 오는 사람들의 답을 듣는것도 수업의 재미요소 중 하나인데, 세계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정말 많더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식에 대해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어.
사실 한국에 있을 때는 먹방, 쿡방 등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들이라 진입장벽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먹는 것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지 못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 가치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미국에서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접하고, 여러 박물관을 다녀보며 그 생각이 완전히 잘 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인 것 같아.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
같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비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서로 나눌 말이 많다는 뜻이고, 감정을 교류하며 온전한 나를 이해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나아는 잘 안 챙겨먹는 것 같던데, 뉴욕에 있는 동안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라도, 나를 위한 요리를 한 번 해줘보는 건 어떨까? 그러고 보니 내가 매일 조언이랍시고 꼰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맛있는 걸 먹고 나누고 풍족함을 느끼는 소소한 행복 있잖아, 그런거. 일상 속 작은 행복의 조각들을 많이 품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나아가 먹는 것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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