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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 모두의 언니 Sep 02. 2023

나쁜 상황은 진짜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어

동생에게 보내는 스물여섯 번째 편지


 나도 비슷해 나아야. 처음에는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고 지금 마음은 어떤지, 어떤 생각으로 지내는지 나누고 싶은 마음에 시작하게 된 교환일기였는데 쓰다 보니 더 잘 쓰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부담감이 생기더라. 초반에 매일 소소한 글쓰기를 할 때는 나아의 글이 매일 저녁 선물이었고, 나도 얼른 답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지기도 했어. 그런데 이제는 어떤 주제를 써야 할까?라는 물음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 나아 말대로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소소한 글쓰기를 해보도록 할게!



 삼 일 전, 남편이 바쁘게 하던 프로젝트가 끝이 났고, 홀가분한 마음을 제대로 즐기자며 급 여행을 떠났어. Cape Cod를 일박이일 여행했는데, 그곳은 나아와 내가 함께 캠핑을 다녀온 곳이기도 하지. 

Cape Cod 여행


 이번에는 Province town이라는 '곶'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에도 다녀와봤어. 영상과 글로만 보다가 실제로 가보니 생각보다 더 크고 관광도시 같은 느낌이 물씬 나더라. 랍스터도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와 항구 구경도 했어. 에어비앤비로 숲 속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잤는데, 살짝 오묘한 느낌의 집이었어.


1박 2일 묵었던 숙소 모습이야


 둘이 여행을 하며 이런저런 음악을 들었는데 최근 내가 푹 빠져있는 악동뮤지션(AKMU)의 노래가 나오는 거야. 순수한 느낌의 뮤지션이라 좋아하는데 남편이 갑자기 그러는 거야. 몽골로 갈 당시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거라고(악동뮤지션은 어릴 때 가족들이 몽골로 넘어가 살았다고 해). 당시에는 몽골에서 사는 게 쉽지 만은 않았을 텐데,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순수한 감성의 노래들을 배출해 내는 것 아니겠냐며 웃어넘겼어. 그런데 계속 그 말이 잔상처럼 남아있더라.


 최근 독서모임을 하면서 "단테의 신곡"이라는 작품을 읽었어. 단테의 신곡은 중세를 총망라하는 작품으로 르네상스 시기가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나온 작품이야. 지옥부터 시작해 연옥, 천국까지 순례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생각한 것을 풀어나가는 작품이었어. 다 읽고 난 후에 이게 왜 대단한 작품으로 칭송받는지 알 것 같더라. 그런데 그거 알아? 이 작품은 단테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피렌체 도시에서 당파싸움으로 추방당하고 난 후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집필한 작품이라는 것을. 만약 단테가 그 도시에서 계속 잘 나가기만 했다면 과연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참 많아.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고 안타깝거나 슬프고 아픈 상황인데, 그걸 다른 무언가로 승화하며 통쾌한 복수를 하거나 그 사람에게서 어떤 광채가 나기 시작하는 그런 일들 말이야.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평생 잘 나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이 막막하다고 해도 계속 그럴 거라는 장담을 할 수도 없겠지. 중요한 건 어떤 상황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의지와 사색, 행동력에 있을 테니까.


 사실 요즘 나는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 때가 있어. 가족이나 친구들도 보고 싶고, 내 자리가 있는 사무실로 출근해서 일도 하고 싶어. 또 돈도 벌고 싶어. 맛있는 한식요리도 먹고 싶고, 내 정서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지내고 싶기도 해. 


 일 년 정도 되니까 슬슬 슬럼프가 오는 걸까? 물론 지금 너무 좋아. 사랑하는 남편,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하는 압박도 없을뿐더러 보스턴의 거주 환경도 너무 좋으니까. 누군가 내 얘기를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한다며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공감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미국에서의 내 삶도 나에겐 챌린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 이 시기를 그냥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무언가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시켜 돌아갈 때의 내 모습은 달라야 한다는 강박, 아주 가끔은 숨이 막혀.


 미국은 경제 대국이니 경제, 재테크 공부를 하며 선진 시스템을 배울 수도 있을 거야. 전 세계의 식재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여러 가지 요리를 하면서 요리책을 출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자극적인 썸네일을 써가면서 유튜브로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거야(쉽지는 않겠지만).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며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는 책을 집필할 수도 있을 것이며,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서 우아한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도 있겠지. 할 수 있는 건 정말 많고, 푹 빠져서 미친 듯이 몰두한다면 뭔가를 얻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까지는 어느 것 하나 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어. 사실 지금도 그러는 중이야.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라는 의문점이 들어. 나의 정체성은 뭘까, 내가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산만하기만 하고 제대로 성장을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렇게 계속해도 맞는 걸까?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서 직장에 복귀하고 돈을 벌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건 어떨까. 수많은 생각들이 뒤죽박죽. (아마 이런 생각엔 십 년 동안 매 달 꼬박 돈이 들어오다 갑자기 뚝 끊기며 남편 월급으로만 살아야 하는 내 신세 한탄도 한몫했을 거야)


 

 또 생각은 많은데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갈무리 지어지는 것이 없어. 아 모르겠다.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여행의 여독을 풀며 원 없이 늘어져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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