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2018년 1월인 어느 날, 막냇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 속의 목소리가 울고 있다.
"언니야. 숙이 언니가 위암이래." 가슴이 덜렁 내려앉는다.
우리 올케 숙이가 말이야? 이 세상 사람들 다 아파도 숙이만큼은 안 아파야 정당할 것 같은 우리 올케의 삶인데...
우리 가족에게는 그 존재감이 너무나 큰 사람이다.
숙이는 몸과 마음이 너무나 건강하고, 얼굴까지 예쁜 의사 선생님이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마음을 써주는 친절한 원장님이 있는 병원에는 매일매일 환자로 가득하다.
명쾌하게,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환자들의 병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도 잘해주고,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내 올케이다.
아버지 사업이 이미 기울어져서 회복할 기력도 없는 우리 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내 동생.
동생과 올케는 고등학생 때 함께 과외를 받으며 서로를 마음에 담아두었다고 한다. 각자 진로를 찾아 대학을 갔고 둘은 그냥 그렇게 헤어져서 지내게 되었다. 내 동생이 대학생이 되었는데 그 당시에 흔히들 했던 미팅도 안 하고 도무지 여학생에게는 관심도 안 가져서 우리 식구는 걱정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동생의 수첩을 보게 되었는데 수첩에는 딱 한 줄 "숙이가 많이 예뻐졌다"가 씌어 있어서 우리 자매 셋은 모여 도대체 숙이가 누굴까 엄청 궁금해했었다. 동생이 군대 제대를 하고 어느 날 숙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고 선포를 하는 게 아닌가! 프러포즈받은 숙이는 왜 이제야 말하느냐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우리는 믿어주기로 했다). 이렇게 동생이 의대생인 올케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우리 가족은 걱정이 앞섰다. 젊잖은 올케네 친정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둘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숙이는 사랑 하나만 가지고 동생과 결혼을 했다.
그 후로 올케의 대학원, 인턴, 레지던트 등 전문의가 되기 위한 10년 정도의 시간 동안 남동생은 함께 밤을 새 가며 공부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물리학과를 나온 내 남동생도 반 의사가 되어 건강에 대해 아는 게 많다.
올케가 두 남매를 낳자, 자기 자식들도 남의 손에 키운 공주과 내 친정엄마와 아버지는 지극정성으로 두 손주들을 잘 키워 주셨다.
그래서인지, 아니. 우리 올케의 성품은 어느 성인이 이럴까?
그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는 삶을 산다.
내 부모님, 우리 형제들, 조카들. 그러니까 곧 제 시댁 식구들인 우리들이 서운할 틈 없이 생일, 명절, 문화생활, 그 외 건강적인 사소한 부분까지 모든 일에 마음과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준 우리 올케이다.
올케와 함께 백화점에 가면, 고개를 함부로 돌리면 안 된다. "언니! 저거 좋아?" 하며 뛰어가 2개씩, 3개씩 사다 안겨주기 때문에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또 올케는 본인이 필요한 물건을 살 때에도 무엇이 됐든 시어머님 것까지 꼭 2개씩 사서 드리기 때문에 엄마는 아버지랑 살면서 허기진 물욕을 며느리에게서 다 채우셨다.
긴 공부를 마친 올케는 그 당시 서울의 허허벌판이었던 동네에 개원을 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못 주었기 때문에, 처음 병원을 차리고 동생 부부는 살 집이 없어 병원 안에다 방 하나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기도 했다. 하루는 병원에 일이 있어 갔더니, 원장님인 올케가 화장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철퍼덕 앉아 부추를 다듬고 있는 게 아닌가. 뭐하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부추김치를 좋아해서 담가주려고요!" 한다. 김치를 어떻게 담그는지도 모르는 여인이...
남편이 퇴근해 오면 맨발로 뛰어나가 맞아주고(병원의 간호사들이 흉 아닌 흉을 보아서 알게 되었다), 어쩌다 남편이 밤 12시에 들어와도 집 안에 생선 냄새를 있는 대로 피워가며 남편 좋아한다고 생선을 구워 밥상을 차려내는 사람이다.
조카들도 만나면 뛰어와 격하게 포옹을 하고, 뽀뽀세례와 함께 애정 표현도 확실하게, 용돈도 두둑이, 용기 팍팍 불어넣어 주곤 한다. 또 수시로 맛있는 음식점을 예약해놓고 식구들 다 데려가 먹이곤 한다.
올케가 한 행동에 말을 다 못 하는 우리는, 올케를 무언의 이구동성으로 천사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로도 표현이 다 될까?
이 천사는, 내 차가 오래되어 에어컨이 고장 나 있는 걸 알고 말도 없이 새 차를 사서 집 앞으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이 차를 7년 정도 타고 다녔더니, 또 새 차가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차가 오래되면 위험하다며...
그런데, 그 올케가!
수술이 끝났다. 올케가 말을 하며 나온다. "아까 웃은 사람 누구야?" 하면서. 살았다. 괜찮다.
마누라밖에 모르고 살았던 남동생이 그동안 어깨 축 쳐져서는 말이 없더니, 동생의 활기 띤 목소리도 들린다.
올케는 병원에서의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왔다. 위를 3분의 2나 잘라내어서 음식을 아주 조금밖에 먹을 수가 없다. 또 아무거나 먹어서도 안된다. 나는 그런 올케에게 말했다.
"숙아! 내가 먹을 수 있게 반찬을 해다 줘볼게!"
'위가 조금밖에 없는 암 환자이다.'
어떻게 하면 맛있고 영양가 있는 밥을 만들까 고심했다.
요리책도 3권이나 사서 보며 메뉴를 짜서 마트로 달렸다. 음식재료는 조금이라도 더 싱싱한 것으로 골라 사는 건 필수,
한 가지라도 더 해 먹이고 싶은 욕심에 매일 5~6가지의 반찬을 만들었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간이 심심하면서 맛있게 하려니 힘들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이 기회가 올케한테 내가 받은 사랑에 보답할 시간이라며 더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었으며, 시누이로서의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힘든 건 두 번째고 감사했다.
병원의 점심시간에 맞추어, 따뜻한 보온병에 뜨끈한 밥과 반찬 담고 달콤한 과일도 한 조각 담아, 내가 가장 겁내는 운전을 해서 도시락을 날랐다.
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내 올케의 건강을 봐주지 않는다. 쉴 틈 없이 환자를 진료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오전 근무에 벌써 진이 빠졌을 올케가 내가 해 가지고 간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흐뭇함으로 내 마음이 꽉 차오르곤 했다. 그리고 올케가 퇴근 후 저녁에 집에 가서 먹으면 좋겠다 싶어 점심 반찬 남은 걸 싸다가 병원 가까이에 있는 집의 냉장고에 넣어두다 보니, 남동생이 눈에 밟히는 것이었다. 막상 내 동생과는 잦은 교류가 있지는 않았지만(주로 올케와 연락을 했다), 핏줄이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슬그머니 동생 좋아하는 음식도 해서 갖다 놓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쏜살같이 지났다.
이제 올케의 건강도 눈에 띄게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긴장감이 조금씩 해이해졌고,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부린 의협심은 오버되어 초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집에 오면 미처 못하고 간 설거지가 한가득 기다리고 있고, 설거지 끝나면 또 마트로 시장으로, 내 집안일도 나를 쉬게 봐주지 않았으므로 내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지 오래 하려면, 원래 하고자 했던 목표에만 집중하고 그 외의 일에는 하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덤비지 말아야겠구나를 깨달아 갈 때쯤.
어느 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데 내 두피에 구멍이 뻥! 하고 났단다.
귀 옆쪽으로 크게 원형탈모가 생긴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카락이 후두득 떨어지더니, 두피가 훤히 보이게 구멍이 뻥뻥!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았다. 나는 골룸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올케의 도시락 배달은 중단되었다.
도시락 싸는 일 때문에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또 다른 큰 스트레스가 나를 덮쳤을 때였다.
가까운 대형병원의 피부과로 달려갔다. 인상이 좋은 건지 원래 웃으며 진료를 하는 건지, 그 피부과 의사 선생님은 웃으면서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다시는 안 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시작된 치료방법은 하얗고 넓은 원형탈모 부분에 스테로이드 약이 든 주삿바늘을 푹푹 찌르며 약물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인정사정없이 찔러대는 바늘이 어찌나 아픈지, (진땀?) 진 눈물이 이거야!라고 알려 주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이 진짜 너무나 아팠다.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나마 붙어있던 머리카락도 빠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눈에서는 눈물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웃으며 다시는 머리카락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적인 말을 내뱉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병원을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미용사의 추천으로 충북대학교 피부과에 탈모 전문의이신 윤태영 교수님을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청주를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윤태영 교수님은 절망적인 나에게 "여사님, 힘내십시오."라고 해 주셨다. 한마디의 말이 절실한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새삼 알게 했다.
주사같이 아픈 치료도 없어 너무 좋았다. 먹는 약과 두피에 바르는 약, 샴푸를 처방받아와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열심히 먹고 바르자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하얀 머릿속에서 잔 털이 수북이 올라와 두피가 채워져 가는 게 보였다. 너무나 기뻤다.
이 잔 털이 자라면 나는 모자를 안 써도 된다.
내가 1년을 넘게 모자를 쓰고 다니자, 동네 사람들 중에는 간간히 "오늘 모자 바뀌셨네요?"라고 인사를 해왔다. 그런 인사를 받은 그다음 날부터는 그 사람을 만날까 봐 빙 돌아 집으로 오기도 했다. 창피한 일이 아닌데 창피했다.
나 자신을 헌신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신을 투자해 헌신하는 것이란 진 눈물까지도 감수해야 할 사랑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 올케는 지금 많이 건강해져서 여전히 주위를 훈훈하게 데워가며 활기차게 지내고 있다.
지금도 맛있는 것만 보면 올케 생각이 난다. 오늘 점심에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었는지, 대충 때우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나는 적은 머리숱을 잘 유지하며 꾸준히 약을 바르고 있다. 이제 내 머릿속의 구멍은 흔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