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의 맛

2003년.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by 이연



한잠 자고 일어나서 식탁에 앉아 바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까 낮에 야채장사 아주머니에게 사과 4000원어치, 토마토 2500원어치를 사고 500원의 거스름돈을 받기 위해 서있는데 바나나 5개를 주신다.

땡큐! 아줌마가 웬일이냐고 서 있는데, 한참을 서 있어도 500원을 안 주시는 거다.

그제야 "네~ 500원어치 바나나를 주신 거네요." 하고 받아 들고 왔다.

500원이라도 자기 수중에 돈이 들어가면 내주는 법이 없는 아주머니의 장사 수단이었던 것이다.

매일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복잡하고 비좁은 골목길로 트럭에 이 것, 저 것 야채와 과일을 가득 싣고 식당 앞에 차를 대고 들어오신다.

"파다, 시금치다, 콩나물이다, 뭐다 다 사야지!" 식당에 주인아주머니는 "안 사! 오늘은 살 게 없어!" 매 번 뒤로 뺀다. 그래도 야채 아주머니는 절대로 그냥 가지 않고, 작은 알감자를 들고 들어오신다. 안 산다고 또 빼는 주인아주머니에게 "그럼 그냥 가? 뭐라도 사야지! 그럼 7000원만 내~ 내 그냥 준다!" 하며 기어이 감자 1박스를 내려놓는다. 주인아주머니가 만 원짜리를 주면 "그럼 3000원어치 뭘 사야지! 딸기 좋아! 딸기 사! "하고 딸기 한 팩을 놓고 간다.

까만 머리에 숱이 많아 파마한 머리 모양이 꼭 양배추를 엎어놓은 것 같은 야채 아주머니가 이제는 귀찮지 않고 귀엽게 느껴진다.

트럭 위의...

이렇게 억척스럽게 살아내는 게 삶인가? 억척과는 거리가 먼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야채 아주머니는 처음에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한다. 그래도 요즘은 트럭으로 운전하고 다니니 큰 발전을 했다 한다. 리어카에서 트럭으로 오기까지 그 아줌마의 고생을 생각해보게 된다. 아줌마에게 트럭 이상의 위로를 받은 게 또 있을었을까?


궁금해하면서 바나나 한 개를 까먹었다. 달고 맛있다!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바나나맛처럼 살아온 내가. 지금 이 식당의 종업원이 되어 5분을 쉬지 못하고 식탁을 차리고 치우고... 남는 시간에는 감자를 까고, 시금치를 다듬는다.


아마도 야채 아주머니도, 또 나도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용기를 낼 수 있는 선택이었겠지. 궂은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살게 된 삶이겠지만 이것 또한 내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 쿨 하게 받아들이면 한층 더 성숙한 내가 되지 않을까? 내 삶, 내 거는 이거! 라며 내가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야지만 진정 자유로운 내 삶을 즐길 수 있겠다라고는 알겠다. 그러니까 아! 내일부터 다시 힘을 내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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