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2월 27일, 19살에 내엄마는 결혼을 했다.
20살이 되기 4일 전, 엄동설한에 결혼을 했던 이유는,
그시절에는 여자가 20살이 넘으면 결함이 있는 처녀라는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였다.
그 당시에 영암 지역에서는 혈통과 부가 갖춰져야 회원이 될 수 있다는 대동계가 있었는데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은 이 회원의 자손들이였다.
엄마가 만난 남편(최선생님: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은 당시에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에 재학중이였다.
그시절에는 결혼식을 치루고 나면 남자는 처가에서 1년을 머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해(year) 먹인다" 고 했다. 그 풍습에 따라 최선생님은 2년후 6.25사변이 터질 때까지 (내 외갓집)처가집에서 사위대접 잘 받으며 머물렀다.
최선생님의 부모님(엄마의 시부모님)은 최선생님이 8살이 되던 해에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건너 가셨다. 그래서 최선생님은 일본 오사카에서 고등학교 까지 다녔는데,
머리가 영특하여 조선사람중에서 유일하게, 오사카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일본학생들 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중 대동아 전쟁(1941년)이 나서 청년들이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는걸 보고 최선생님의 부모님께서는 외아들을 지키고자 서둘러 한국으로 보냈다. 최선생님은 고향인 전남 영암군 구림면에 있는 백부집으로 왔다가 내엄마와 혼인하게 되었다.
4일 밤을 지내고 나니 새해가 시작되었고 엄마에게는 바로 아기가 생겨 20살이 였던1950년12월2일에 아들을 낳았다.
결혼을 하고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서울로 간 최선생님은 아내가 아들을 낳으니 졸업도 하지 않고 처가로 내려와 버렸다. 마침 학교에서도 사회 운동원으로 몰려서 사회주의 사상을 어린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선생은 위험하다면서 졸업을 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백방으로 손을 쓴 장인어른(그시절 나의 외할아버지께서는 백 그라운드가 조금 있었답니다)은 졸업장을 받을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곧바로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으로 초빙되어 근무 하며 평화로운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던중 1951년 6.25일, 전쟁이 났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남 삼호면 용당리 바닷가 옆에는 엄청나게 큰 석유 창고 3개가 있었다. 1951년 6월 25일, 그 석유창고에 폭격이 가해져 석유창고가 폭팔을 했다. 그러자 평화롭기만 한 시골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고 시커먼 연기는 옆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용당리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곧
포 사격이 시작 될 거니까 주민들은 30리 밖으로 피신 하라는 소문을 듣고, 대가족인 엄마네 식구들은 시커먼 연기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손으로 더듬거려 식기들을 챙겨 지게에 지고 일단 10리 밖에 있었던 상록이라고 불렀던 일꾼네 집으로 피신 갔다.
여기에서 몇일을 지내고 30리 밖으로 피신 가기 위해 다시 짐을 꾸려 엄마네 3식구는 시댁이 있는 전남 영암 구림으로, 할아버지, 삼촌들, 이모들은 엄마의 외갓집 영암군 학산면으로 가기로 하는데, 엄마의 친정엄마는 떠나지 않고 상록이 집에 남아서 연기가 사라지면 집으로 들어가서 큰 살림을 지켜야 한다면서 한사코 고집을 꺽지 않으시고 큰며느리로서의 사명을 지키셨다.
엄마와 최선생님과 돌도 안된 갓난아기 세식구는 구림으로 가기 위해 걷다가 걷다가 발에 물집이 생기고 부르터서 더 이상 걸을 수 가 없게 되자 구림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엄마의 사돈 되는 작은엄마 친정집에서 신세를 졌다. 집이 좁아 마당에다 덕석을 깔고 하룻밤 자고 날이 밝자 사돈 집에서 마련해준 구루마를 타고 무사히 구림까지 갈 수 있었다.
시댁인 구림에 도착 하니까, 최선생님의 부모님이 일본에서 보내준 돈으로 살고 있던 친척들은 처음 본 새댁임에도 같이 살자며 여기 저기에서 살갑게 반겨 주었다. 그래서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엄마 마음속은 친정 소식이 궁금하여 애가 탔다. 장이 서는 곳에 가면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친정엄마 소식을 들을까 해서 장 서는 날만 기다려 아기를 업고 나가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친정엄마 소식을 들었는데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자서 큰 집을 지키던 외할머니께서는 지주라는 이유로 좌익군(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엄마의 친정집에 머리가 약간 모자른 길산이라는 머슴이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총살을 당하자, 모자른 머리로 30리 밖에 있는 엄마의 외갓집(학산면)을 물어 물어 찾아와 외할머니의 죽음을 알렸다.
정작 내 딸은 없고 딸의 시댁식구들 치닥거리 하느라 정신 없았던 외할머니의 어머니(나의 증조할머니)께서 머슴 길산이에게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다그쳐 묻자 길산이는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고 한참을 서럽게 울고 나더니 "돌아가신 마님 시신 위에 가마니 한 장 덮어놓고 그 위에 돌을 올려 놓고 왔어라~" 라며 흐느끼더라고.
그 말을 들은 증조할머니께서는 사돈들이며 뭐며 다 꼴보기 싫으니까 다 나가라고 소리치며 가슴을 치면서 오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잘 살았던 외갓집은 텅 빈 집이 되었고, 동네에도 쌀 한톨 남김없이 다 빼앗기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6월에 용당리를 나와 구림으로 피난 간 엄마의 세 식구는 몇달동안, 항상 비상식량인 미숫가루를 싸놓고 불안에 떨며 살고 있었다.
구림이라는 곳은 동네가 길었다. 그 동네를 둘러싼 긴 산 위에다 태극기를 쭉 꽂아놓고 총을 가진 군인들이 포위 하고 서서 " 손 들고 나오면 안 죽인다. 손들고 나와라! 나와라! 하며 확성기를 통해 소리를 질러대면서 바로 머리 위에서 쏘는 듯한 엄청나게 큰 총소리로 위협을 가 했다. 빨갱이를 잡아 낸다면서.
그 때 엄마는 물론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는 시컴한 재를 바르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큰 남자옷을 입고 살았다.
그 곳에 머무르는 동안 최선생님은 평소에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나오라고 소리쳐도 절대 나가지 말라고 교육을 시키며 집집마다 땅에 구멍을 파서 드럼통을 묻게하며 숨을 곳도 준비하는등 대비를 시키고 했다. 그러나,
빨리 나오면 안 죽인다는 확성기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든지 어느날 최선생님이 밖으로 나가려고 마구 서두르면서 엄마에게 아들 잘 기르라는 당부를 하는등 안절부절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최선생님이 나가자 동네청년들도 따라 나갔고 엄마도 아기를 업고 따라 나갔다.
총을 든 군인들이 " 남자는 이 쪽에 서고! 여자는 저 쪽에 서!" 라고 해서 엄마가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총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벌써 청년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모두에게 총을 쏘았고 청년들은 이미 파 놓았던 굴 속으로 다 떨어졌다. 최선생님도 그 굴 속으로 떨어져 들어 갔다.
저쪽으로 선 여자들에게도 군인들이 " 너 나와! 너 나와!"해 젊은 여자들에게도 총을 쏘아 죽이기 시작 했다. 드디어 엄마 차례가 왔다. 앞에서 죽은 처녀들을 보니까 모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뒤로 넘어지면서 죽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는, 아기를 업고 총을 맞으면 뒤로 넘어져서 아기가 죽을까봐 업고 있던 아기를 풀어 옆에 같이 서 있었던 친척에게 애기를 넘겨 주려던 순간!
키가 큰 군인이 엄마 앞으로 다가오더니 " 학교는 어디서 다녔소?" 라고 물었다. 엄마가 "목포에서 다녔어라~"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또 물었다. "그럼 남편은 어디 있소?" 엄마가 "저 쪽에서 죽었소!" 라고 하자 미간을 찌뿌리더니 "빨리 집으로 들어가쑈!" 라고 해서 엄마는 포대기에 싸인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한참을 살고 난 후 정신이 좀 차려지고 생각해보니, 그 때 그 군인생각이 났는데, 어렸을때 같이 학교에 다녔던 친구의 오빠였던 것 같다고. 학교가 늦게 끝나는 날에는 통통배를 놓치게 되는데 그 때마다 그 친구네 집에 가서 자곤 했다. 그 친구네 집에 가면 그당시에 여느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귀한 팔각상에 내온 고급 간식을 먹었었는데, 그 친구집은 기생집을 했던 것 같고, 그 군인은 그 친구 집에서 보았던 친구의 오빠였던 것 같은데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얘었다고 엄마는 70년 전 얘기를 조근조근 하다가도 격양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