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아침 시간이 꽤 괜찮게 지나고 있다.
토마토 주스 하고 빵 한 조각을 바삭하게 구워주니 맛있게 먹고 회사에 출근하는 딸을 배웅하고 나서, 게으름에 빠져들지 않고 곧바로 운동을 했다. 덕분에 오늘 하루를 잘 지내야겠다는 의욕이 솟아났다. 씻고 나니 더 개운해진 몸과 마음이 되어 내 자리 식탁에 앉아 라디오를 틀었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메모리가 흘러나온다. 참 좋다.
이런 시간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준다.
조금 지나서 작은 딸에게서 전화가 온다. 출근하는 길이라면서.
애는 꽤나 행복해 보인다.
요즘에는 남자 친구와 차 마시는 것에 빠졌는데, 어제는 남자 친구가 20만 원이나 주고 차 우리는 주전자를 사주었다고 자랑을 한다. 그 주전자에 차를 우려서 한 잔 먹고 출근을 하니 기분이 좋다고 한다.
회사 가기 싫다고 징징 거리기가 일쑤 더니.
이상한 일이었다. 내 딸은 그 흔한 사랑을 한 번도 못했다.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 사건이다. 이런 것까지 대물림?
올케는 비가 오면 내가 한 말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난다고 했다.
'올케! 나는 말아야~ 비가 와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라고 한 "서글픈 그 말이 왜 이렇게 웃기는지 모르겠어~"라며.
어디다 내놓아도 빠질 것 없는 딸이 점점 세상살이에 재미가 없다 하고 성격이 예민해져 갔다. 그러다 보니 딸과 부딪혀 언성도 높이기도 했고 까칠하게 반응하는 딸을 피하려 비위를 맞추고 살았다. 어릴 때는 천사같이 예뻐서 이 딸을 키우면서 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는데...라는 말만 되뇌었다. 지랄 총량의 법칙에 따르느라?
나는 생각했다. 그 애한테 절실하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잘 아는 나였기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엄마의 기도밖에 없지 않겠는가?
성모님 상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 했다.
"성모님도 엄마니까 아시잖아요. 자식이 이 세상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받은 삶이라는 걸. 하느님께 전구 해 주세요~ 내 딸에게 훈훈한 남자 친구를 보내 주시면 얼은 딸의 마음이 녹아 따뜻해지게요. 축복을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며.
다 큰 딸 이런 것까지 기도하는 엄마가 또 있을까 싶어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가슴앓이였다.
유학을 갔을 때 나는 은근 기대했다. 거기에는 내 딸을 흠씬 좋아하는 훈남이 있을 거라고.
눈이 머리에 붙은 내 딸의 마음에 들 리가 없는 한국 남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먼 곳 타지이니까 외로워서라도 그 학생도 내 딸도 서로 좋아하지 않을까 했지만 아니었다.
분명히 내 딸은 남자 앞에서는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너무나 싸가지 없거나 하는 거라고 식구들은 입을 모았다
딸도 그렇고 나도 이제는 남자 친구가 생길 거라는 희망을 버릴 즈음에 2살 어린 침착한 청년이 딸에게 용감하게 다가왔다.
처음에 딸은 그 친구는 자신의 남자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몇 달이 채 안 가서 딸에게서 밤늦게 전화가 와서는 " 엄마! 나 민식이랑 사귀기로 했어!" 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민식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이 들어 "그래! 축하해!" 했지만 얼마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둘의 사랑이 점점 돈독해져 가는 게 아닌가?
그들이 좋아져 갈수록 나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 딸에게 내 속 말을 잘못했다가는 딸 하고도 이 절이 날 일이요 내 형제들에게도 떳떳하게 " 걔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키도 작고 가진 것도 없는 민식이가 왜 그렇게 좋아? 묻기라도 하면 딸은 정색을 하고 "얼마나 예쁜데! 조용하니 차분하니 있는 듯 없는 듯, 민식이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대, 그리고 엄마! 나 이제 키 같은 것 보이지도 않아, 오히려 키 커가지고 속 못 챙긴 사람 보면 더 꼴 보기 싫어!" 한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럼 지 눈에 니가 당연히 이쁘지! 너는 민식이 여친 하기에는 아까워!" 힘주어 툭 쏘아 주었다.
내 속을 모를 리 없는 딸인데...
왜 이리 억울한지, 내가 너무 밑진 장사를 하는 것만 같아 속이 딱 상하다.
내 삶에 가장 위로자 이시며 만만한 하느님께 또 따져 물었다.
" 하느님! 제게 끝까지 왜 이리 인색하시나요? 키도 좀 크고 돈도 쫌 있는 훈남이기를 기도하지 않은 내 탓인가요?"
아, 기도 할 때 더 구체적으로 할 걸 그랬어!
내 말 잘 들어주는 큰 딸에게 토로 하자 큰딸이 나에게 묻는다. "엄마는 사위 고를 때 제일 우선하는 게 뭐야
"으음 음 성격이지?"
"그럼 딱이네!"
성격이 과격한 남편과 살면서 인생이 구차해져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성질 좋고 정서가 잘 맞는 사람과 결혼할 거라 했던 나였으면서...
그래!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어.
내가 원하는 완벽 같은 바람은 내 인생에,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성하면서 밑진 장사라고 생각했던 나를 부끄러워 했다.
민식이는 보면 볼수록 훈남 그 자체다. 내 딸 옆에서 조용히,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잘 이끌어 주고 있는 것 같다. 까다로운 딸이 저렇게나 만족해하는 걸 보면서 문득 민식이 엄마는 어떤 사람이길래 아들을 이렇게나 착하게 차분하게 키웠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로마의 대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가기를 기대하지 말라.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라.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오게 하고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가게 하라. 그때 그대의 삶은 순조롭고 마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영혼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은 소망은 가득 하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