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울까 더울까 쾌적한 봄날에 갖가지 꽃들도 만발하여서 황홀한 세상이다.
살짝 열어둔 현관문 사이로 부드러운 봄바람이 들어와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 하는 나를 간지럽힌다.
문득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이 집이 참 좋다!"
지난가을에 이사 와서 겨울을 지나고 봄을 살고 있는 이 집.
작년에, 함께 살았던 딸의 독립을 위해 마련해 놓았던 아파트 24평으로 이사해서 딸과 2달을 같이 살면서 살림살이도 갖춰 주고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고, 나는 서울에다 18평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둥지를 틀었다.
점점 작아진 집으로 옮기면서 집이 작으면 어때? 나는 적응을 잘하는 성격이어서 문제없이 잘 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뒤돌아 서면 싱크대요, 뒤돌면 식탁이고, 뒤돌면 화장실인 집은 숨이 턱 막혔다.
답답함이 하루하루 나를 엄습해 왔다. 급기야 마음이 우울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가을이 점점 깊어 가면서 세상은 아름다움에 미치고 있었고 나도 미친 듯이 여기저기 동네를 헤매었다. 그러다 발견한 산!
그 산 안에 자리한 작은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빼들고 밖으로 나가 잘 생긴 산봉우리를 마주하고 앉아 책을 읽는데 불어온 가을바람과 그 책은 단박에 내 정신을 깨 주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라는 책이었는데 김 환기 화백과 부인 김 향안 여사의 사랑과 삶을 담은 책이었다. 그날 나는 그 책을 몇 페이지만 읽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어서 다음날이 오기를 기다려 단풍이 너무 아름다운 산으로 달려갔다. 그 책을 꺼내 들고 다시 그 장소로 가서 또 몇 페이지만 읽고 집으로 오곤 했다. 얼른 산에 가야 할 구실을 남겨 두기 위해 몇 페이지씩만 읽고 내려왔다. 대여가 안 되는 산속 도서관 덕분에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갔던 아름다운 산과 가을바람과 화백님 부부의 사랑은 차가웠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바꾸어 주었다.
집이 작아서 힘들었다 했던가? 겨우 220센티미터의 싱크대 길이가 제법 길어 보이고 깨끗한 이 집이 좋다.
창틀이며 중간문이며 싱크대며 화장실 타일 색깔등 제법 자제들을 잘 써서 수리를 해 놓은 집주인의 배려 덕분이다. 계약할 때 본 집주인 부부는 인상이 좋았고 멋스러웠는데 그 모습다운 배려가 더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찌 된 운명인지 결혼 후 2년이 멀다 하고 이사를 다녔다. 나를 만난 집들은 나의 수고로 새 집이 되곤 해서 집을 내놓으면 첫 번째로 보러 온 사람이 바로 계약을 했더랬다. 그만큼 수고를 많이 하고 산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주시고 싶어서 이 집을 허락하신 것 같다.
집이 깨끗해야 행복할 수 있는 나는 이 집주인에게 감사해서 그분들을 위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복 많이 받으시라고!'
진심을 다해 살면 나도 누군가의 진심 어린 기도를 받으며 살 수 있겠다 싶다.
나도 전세를 놓고 살면서 세입자에게서 뭐가 고장 났다고 전화가 오면 짜증부터 났고 내가 살 집도 아니라고 대충 땜질식으로 고쳐 주고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다.
나이 들어서는 집이 작을수록 더 좋다고 한 선인들의 조언을 내가 실감하는 중이다.
내 사촌언니가 65세가 되었을 때 형편이 어려워져 32평 전셋집을 구해 이사를 했는데 '이 나이에 집도 없다. 니 형부가 돈벌이가 시원찮다'며 신세한탄으로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슬퍼하는 언니가 딱해 말했다. "언니! 변두리로 나가면 24평 아파트는 살 수 있잖아~ 출퇴근하는 사람도 없고 둘이 살기는 좋지 않겠어?"라고 했더니 언니가 정색을 하며 "나! 여기서 죽어도 더는 못 내려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언니가 또 딱해서 생각이 난다.
언니의 사고로 말하자면 나는 곤두박질하여 24평도 아니고 18평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살아 보니 참 좋다.
청소할 게 없고요, 관리비도 너무 싸고요, 보일러를 마음대로 틀어도 난방비 걱정 안 해도 돼서 따뜻하게 살 수 있어요. 나도 32평 아파트 살 때는 보일러를 마음대로 틀지 못해 추워서 큰 거 작은 거 전기 매트를 여기저기 놓고 살았었는데 여기로 이사 와서 살아보니 한 개도 필요하지 않아 다 버렸다.
한때, 좀 더 우아하게 살겠다고 집을 장식했던 장식품들, 그것을 담는 장식장들도 필요하지 않은 거라 다 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가지고 이사 왔다. 집이 작으니 불필요한 물건은 자연스럽게 버려졌다.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내가 죽으면 내 자식들이 버려야 할 텐데 그 수고를 덜어 준 현명한 엄마가 된 것 같아 흐뭇하다. 적재적소에 놓아둔 몇 안된 내짐이 홀가분하고 오히려 내 마음을 꽉 채운다. 왠지 자식들에게도 떳떳하다.
봄날의 날씨가 선사한 기분 좋은 이 아침에 2인 작은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책상이 없어서, 식탁이 작아서 글을 못쓰는 게 아니다.
글을 잘 써서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이 시간이 아깝다 생각이 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인천 송도 어딘가에 살고 계시는 집주인님! 내가 잘 살고 있답니다.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