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신세대, 나는 구세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기

by 딜레이씨


지지난 토요일 할머니가 추석에 받은 갈비가 아직도 남아있으니 같이 구워 먹자고 엄마와 나를 불렀다. 할머니 집과 우리 집은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라 한 달에 세네 번은 함께 밥을 먹곤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가끔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고기나 맛있는 음식이 선물로 들어왔으니 같이 먹자고 나와 엄마를 꼬신다.


밥 먹으러 가는 겸사겸사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러 간 것이었지만 막상 준비한 갈비는 맛이 없었다. 고기는 질겨서 고무를 씹는 것 같았고 기름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앙념이 먹을만했다.

제일 빨리 밥을 다 먹은 나는 tv앞에 앉았다. 주말 황금시간대 mbc에서는 놀면 뭐하니가 막 시작하고 있었다.

요즘 제일 재밌게 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날따라 환불 원정대의 데뷔 의상 콘셉트를 정하는 내용이라 몸매가 다 드러나는 야시 꾸리 한 옷을 입어보는 장면이 나왔다. 여기서 무엇인가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눈치를 봤다. ‘할머니는 이런 거 못 받아들이실 텐데?’, ‘엄마도 보수적인데 할머니는 얼마나 보수적이겠어!’, ‘옷이 저게 뭐냐고 욕하진 않을까?’ 혼자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채널을 돌려야 하나.. 싶었다. 나는 민망하거나 긴장하면 괜히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라 티비에 나오는 환불 원정대를 보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아.. 나도 연예인처럼 몸매 좋으면 저런 옷 막 입고 다니는 건데.."

"그러게 아주 옷도 멋있고 몸매도 좋다야"

"에? 할머니 저런 옷 입고 싶어?"

"야야, 내가 젊고 예뻤어봐 저런 거 왜 못 입니!"


그녀는 오히려 저기 나오는 4명이 다 이쁘다며 칭찬일색이었다. 특히 화사는 허리는 얇은데 엉덩이는 크다며 완전히 서양인이라고 칭찬했다.


"쟤가 누구냐, 쟤가 화사지? 쟤가 요즘 TV에 많이 나오더라~"

엄정화, 이효리는 그렇다고 쳐도 그녀 입에서 화사가 나온다는 건 정말 신기했다. 할머니는 내 생각보다 신세대였다. 오히려 할머니가 이런 걸 이해 못 할 것이란 편견을 갖고 있던 내 생각이 구시대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내 생각보다 꽤 신세대다웠다. 올해 초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받았을 때도 봉준호 감독이 아주 큰일을 했다며 먼저 말을 꺼내기도 했다. 80대 할머니와 아카데미라니, 기생충이라니! kbs 주말 드라마 보는 것이 가장 큰 재미고 경로당에서 화투 치는 게 일상이라던 할머니가 아카데미 상을 언급할 줄이야! 우리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 다르다고 확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기성세대는 요즘 세대의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로 나를 비롯한 요즘 세대도 그들을 잘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나와 다른 생각인 사람을 이해시키는 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차피 이해 못할 텐데’라는 말로 덮어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단정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건 아닐까 싶었다. 나도 환불 원정대가 아니었다면 할머니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할머니는 아직도 결혼은 꼭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에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하시지만, 어떻게 모든 면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고 기대하겠는가. 60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녀와 공감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됐다. 앞으로 그녀 집에 종종 찾아가서 재밌는 얘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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