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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Aug 23. 2017

모든게 처음이고, 새로움이었던 런던







비몽 사몽 얼굴만 겨우 씻고 자고 일어난 그대로 밖을 나섰다. 위키드 데이시트를 위해 그런 몰골로 런던의 거리를 걸었다. 아마, 런던에 처음 도착했을 때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 같다. 달라진게 있다면, 그때는 어딘가 초라한 나의 모습에 움츠러들어 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모습이 런던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런던에 익숙해진 기분이었다. 런던에 익숙함을 느끼는 기분이 좋았다. 지금 내곁을 스쳐가는 사람과 어젯밤 같이 잠에 들고, 오늘 아침 같은 모습으로 잠에 깨어 이 거리를 걷고있을거라는 사실에 잠깐이나마 그들처럼 런던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매표가 열리는 10시가 되기에는 한 시간이나 넘게 남았지만, 우리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에서, 오기 전에 사온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좀 더 싼 가격에 뮤지컬표를 얻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달려와 이렇게 서서 아침을 때우고 있지만, 불편하기 보단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뮤지컬을 언제든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러웠다. 돈이 넉넉하지 못할때도 이렇게 아침에 조금만 부지런을 떤다면 뮤지컬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부러웠다. 이전의 나에게 뮤지컬은 조금 특별한 날, 큰 맘 먹고 봐야하는 그런 문화이었는데, 여기서는 영화처럼 쉽게 볼 수 있었다.


영국이 문화강국인건 이런 환경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들을 매일 마주한다면, 이렇게 쉽게 티비를 보듯이 볼 수 있는 뮤지컬이라면, 문화적 상상력이 커질 수 밖에 없지않을까. 어쨌든 그게 무엇 때문이건, 런던은 많은 상상과 생각을 하게하는 혹은 가능케하는 곳 이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 전망대를 오를까 말까 고민하다 오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옆이 뻥 뚫린채로 끝도 없이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채 거의 울듯이 다리를 후들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높은 곳을 오르는게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막혀있지않는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나에 대해. 담력키우기 같았던 계단오르기가 끝나고 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구름이 빼곡하게 하늘을 뒤덮은 흐린 런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올라올만큼 아름답진 않았다.


아마 진정되지 않은 두려움이 내 안을 구름처럼 빼곡하게 뒤덮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내려오는 길도 역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 내게 수고했다는 듯이 밖으로 나오니 아까 위에서 본 구름들 사이로 햇빛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쿵쾅거리던 심장이 사그러들때 쯤 구름들도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햇살이다.






유럽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특히 런던과 파리가 그랬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날씨가 바뀌었다. 흐리다가도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고, 쨍쨍하다가도 비가내렸다. 매일 무슨 옷을 입어야할지 고민되고 우산도 매번 갖고 다녀야하는 점이 불편했지만,


그렇게 변덕스럽기에 흐리거나 비가오는 날에도 햇살을 기다리며 즐길 수 있었다. 언제고 곧 햇빛이 나를 비출 것 이라는 기대감이 흐린날씨도 기분좋게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쩌면 이보다 더 변덕이 심한 날씨를 마주할 것 같다. 대부분 구름이 빼곡히 덮어 어두운 나날들일 것 같다. 어쩔땐 비가 내려 홀딱 젖는 날도 있을 것 이다. 그럴 때, 지금처럼 햇살이 나올것을 기대하며 이 조차 즐겁게 기다릴 수 있을까. 아니면 창문을 꼭꼭 닫고 언젠가 그치기만 기다리게 될까.












런던에서는 지하철보다 주로 버스를 이용했다. 새빨간 2층 버스는 그 자체로 런던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2층 으로 올라가서 맨 앞자리에 앉아 지나치는 런던의 풍경을 보는 것이 좋았다.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차마 가지 못했던 곳들을, 내 걸음 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치며 이것으로라도 대신 하라는 듯.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나치듯 봐도 아름다운것은 아름다웠으니.



 









저녁시간이 다 되가는 시간에 미리 예약해둔 에프터눈 티를 먹었다.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우리를 웃으며 반겼고 친절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을 하곤 했다. 바쁜 와중에도 우리가 무언가를 필요로 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 주는 섬세함이 돋보였다. 우리는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은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 뿐이겠지만, 즐겁게 자신의 일을 즐기며 하는 그 사람은 우리에게도 즐거운 에너지를 주었다.


나도 저렇게 내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내 일을 열심히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분좋은 에너지까지 선사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분에게 사진을 같이 찍을 수 있냐고 물었다. sure!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사진을 바라 볼 때면, 무엇을 하게 되든, 이렇게 환한 웃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든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볼 수 있다는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했던 위키드 공연이었다. 쉼 없이 연기와 노래를 이어가는 배우들을 보며 감탄이 이어졌다. 결국은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박수를 치게되는 공연이었다.


티비를 통해서 기립박수를 받는 장면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럴때마다 그 무대위에서 자신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주인공들은 얼마나 벅차오를까, 어쩌면 나는 평생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 기분을 알 것 같다.
무대 위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내가 공연 중 느꼈던 그 감동과 벅참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게되는 이 감정이,
그와 같을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런 공연을 마음만 먹으면 매일이라도 볼 수 있다니, 직접 보고 나니 아침에 느꼈던 부러운 마음이 더더욱 커진다. 에프터눈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 런던에 사는 한 사람은, 런던에 살고 싶다는 우리에게 웃으며 집값이 엄청 비싸. 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울도 비싼걸 이라며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농담반 짐단반으로 던진 말이 겠지만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안다. 여행을 한다는 것 과 사는 것은 별개라는 것. 잠시 머물기에 모든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건물에 둘러쌓인 행복한 기분은, 그것을 보러온 관광객들에게 둘러쌓인 불쾌한 기분으로 바뀔 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럼에도 한번 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이것이 런던이 주는 매력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아직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거리를 거닐었다. 빅벤과 런던아이의 야경을 한번 더 보기로 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비지 않은 빅벤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곧 오랫동안 수리를 받게 될 빅벤은 온전히 빛나고 있지 않았다. 수리가 끝나 다시 온전히 빛날 때를 기약하며 런던 아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빛으로 빛나는 런던아이를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았다. 저 곳에 앉아 바라보면 어떨까. 런던아이라는 말 처럼 런던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을까. 다음에 오게 된다면 저 곳에서 이 곳을 바라다 보고싶다.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코벤트 가든에 들렸다. 코벤트 가든 근처에서 자리를 잡아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오랜만에 다시 연필을 들었다. 썩 맘에 들지 않은 그림이 완성 될 동안, 다시 거리에는 햇살이 비추었다. 마지막 날 이었다. 마지막 날인 만큼 무엇을 해야할까 생각했던 어젯밤, 프림로즈힐이 좋았다고 말한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림이 완성되었다. 스케치북을 덮고 프림로즈힐을 핸드폰 자판으로 옮겼다.


버스를 타기위해 트라팔가 광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도 역시 무대와 철조망이 설치된 광장의 모습이었다. 새삼 첫날 눈이 일찍 떠지는 바람에 이른 시간에 온전한 트라팔가광장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리젠트 파크로 향했다. 프림로즈힐은 리젠트파크와 생각보다 떨어져 있었다. 리젠트파크에서 그 곳 까지 걸어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양 옆에 자리잡은 나무들 사이로 지나는 길이 좋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파크가 곳곳에 있는 게 좋았다.








프림로즈힐에 도착했다.



가까워질듯 먼 언덕을 오르고 런던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돗자리를 깔았다. 그 곳에 앉아 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저 바라보았다. 노래를 들으며 그저 그 곳을,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았다. 흐릿했던 날씨에서 다시 등 뒤로부터 해가 비추기 시작했다. 햇살을 피해 그늘 아래 다시 돗자리를 피고 누웠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을 들었다. 노을 진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는데, 여름의 런던에서 노을지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한국에서 이미 예약한 라이온킹을 보러가기 위해 아쉽지만 노을진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다시 런던시내로 돌아가야만 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프림로즈힐을 벗어나 비교적 익숙한 런던 시내가 아닌 낯설은 거리를 걸어갔다. 역시나 아름다운 이 길을, 내일 이 시간쯤에는 런던이 아닌 곳에 있게 된다는 사실에 조금은 슬펐다.


런던이라는 도시와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별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람간의 이별 처럼 장소와 시간과의 이별도 내 가슴을 공허하게 했다. 물론 새로운 도시가 그 곳을 곧 채우겠지만 그것 조차 서운할 정도로 좋았던 이 곳, 런던














라이온킹 뮤지컬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애니메이션은 표현하는데 어떤 영화보다 제약이 없다고 말 할 수 있고, 무대 위에서 바로 이루어지는 뮤지컬은 어떤 공연보다 제약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애니메이션을 무대 위로 옮긴 뮤지컬 이었는데, 장담컨데 무대 위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출과 연기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저런 표현과 연출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공연 내내 들었다. 정말로 그 어렸을 적 보았던 라이온킹의 내용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 좁은 무대위에서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 연출이었다. 오히려 영화보다 더 큰 생동감에, 내가 그 내용안으로 초대 받은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연출의 향연에 내 입은 좀 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깐, 런던은 내게
모든 처음인 도시였다.
첫 유럽 여행지, 첫 장기여행의 시작, 내 오랜 꿈의 시작, 그리고 라이온킹이라는 뮤지컬을 통해 마지막 까지 새로움을 선사한
런던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간다.






내일은, 내가 머물게 될 도시 중 가장 오래 머무는, 내가 그토록 기대하던 도시 파리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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