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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Sep 30. 2017

그림 같은, 파리





여행을 하기 전 일정 계획은 거의 하지 않았다. 굵직굵직한 관광지 정도만 생각했을 뿐. 예약한 교통과 숙소 바우처만 들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교통과 숙소 예약도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이 하곤 했었다. 해야하는데- 라는 조급한 마음이 내 머리를 뒤덮어도, 쉽사리 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내 여행을 만들어간다는게 두려웠다. 제대로 된 여행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잘 다녀오기를 바라는 바람이 자꾸 주저하게 했다. 더 완벽한 때가 있을 거라고, 더 잘다녀올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기다리면서도 조바심을 냈다. 완벽한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아는데에만 몇년이 걸렸다. 


교통을 예약하고 숙소를 정하면, 내 여행은 계획에 맞춰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였다. 그게 두려웠다. 그 미래에 내가 없지는 않을까, 아니 그 미래에 내가 있기에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은 아닐까. 배가 간지러운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 계속됐다. 교통과 숙소를 하나하나 예약할때마다 여행은 선명해져갔다. 그토록 원하던 여행이었는데 우습게도 여행이 선명해질수록 여행을 원하던 내 마음은 불투명해졌다.


계획을 하면서 부푼기대를 갖게 될까, 그러다 언젠가 펑 터져버리진 않을까 겁이 났다. 애초에 계획이 없다면, 계획을 지키지 못해 실망하는 날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적거리던 책들을 내려 놓았다. 여행에서 '익숙함'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행할 곳의 사진이나 이야기를 보고 나면, 그곳에서 내가 보게 될게 낯설고도 새로운게 아닌, 익숙한 장면들이 될 것 같았다. 떠나기도 전에 익숙한 여행이 되는게 싫었다.


그래서 결국 그토록 낯설고 아름다운 곳에서도 변함없는 내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잘 해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또 변할 수 있는 '나' 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나'는 영원토록 오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저 이 순간 지금의 '나'가 지금의 여행에 가장 어울리는 '나'라는 것을 여행 시작 후 얼마 뒤 알았다.



우리의 삶은 하찮고 지엽적인 일들로 인해 야금야금 낭비되고 마침내 소진되어 버린다.
- 월든

















여행이 시작된 뒤, 매일 밤 마다 내일 일정을 정해야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날이 갈수록 몸이 안 좋았다. 계획은 커녕 기절하듯 잠들기 바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밖에서 천천히 걸으며 여행할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은 남아있었다. 분명 아침에는 온 몸이 부숴질것 같이 여기저기가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밖으로 나오면 언제그랬냐는 듯 괜찮았다. 어떻게든 여행을 이어가고싶은 나의 의지 때문인지, 설렘이 그 아픔을 잊게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그랬다. 물론 전 보다 자주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했지만, 그 정도라도 좋았다. 지친 몸을 쉬면서 볼 수 있는 것이 회색 빛 천장이나 벽이 아니라, 이런 풍경이라는 것이 좋았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좋았다.


오늘도 힘겹게 아침에 눈을 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꼭 방을 비워주어야 하기에 적어도 10시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뮤지엄 패스 4일권도 이제 3일이 남았다. 그 당시에 나는 그런 규칙이 있는 호스텔을 예약한 걸 후회하기도 했었다. 뮤지엄패스도 4일권 대신 2일권을 샀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지나고보니 그런 규칙과 패스 때문에 어떻게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와서 파리 시내를 걷고, 벤치에 앉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 당시 내 몸은 힘들었겠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힘들더라도 기어코 간 곳이 대부분 '와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곳 이었기 때문에.



일단은 걷기로 했다. 어제의 오후처럼 벌써부터 뜨거운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그 동안과는 반대로 개선문을 등진채 샹제리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어정쩡한 시간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다들 개선문을 향해 가는 샹제리제 거리를 반대로 걸어서 그랬을까 사람들도 차들도 그리 붐비지 않았다. 고요하기까지 했다.






걷다 보면 작은 정원같은 공간들이 나온다. 네모난 나무에 둘러쌓인 작고 푸른 공간, 들어갈 수 는 없었지만 보기만해도 쉼이 되는 공간이었다. 곧 혁명기념일을 앞둔 파리에는 어디고 낮은 펜스가 세워져 있었다. 저기 앞에 있는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보려했지만 이 것들을 어떻게 넘어가야할지 난감했다. 결국 오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가야할 곳을 정하지 않았으니 내가 걷는곳이 내가 가야할 곳 이었다.









그 곳에는 역시 아름다운 건물들이 마주보고 있었다. 두 건물 사이로, 저- 앞에 알렉산드로 다리와 육군박물관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건물들은 쁘티 팔레와 그랑 팔레 였다. 이 박물관들을 둘러쌓고 있는 들판과 듬성듬성 있는 나무와 작은 꽃들을 보고 있었다. 그 들판에 비친 햇빛에 초록색과 금색으로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보고 있었다.

괜히 서성이다, 이곳에 온 나같은 관광객의 부탁에 사진도 찍어주다, 가운데 길목에 서서 이 두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알렉산드로 다리와 박물관의 모습을 찍다가, 다시 쁘티팔레 앞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매일 빠짐 없이 들고 다니던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앞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행을 시작한지 열흘이지만 아직은 두번째 그림이다.


혼자 여행을 결심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여행을 상상했다. 마음을 끄는 곳에 혹은 그냥, 그곳이 어디든 턱하니 앉아 스케치북에 굵은 연필과 투박한 솜씨로 앞에 보이는 풍경을 눈으로 담고 그림으로 남기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어 같은 풍경을 오래 바라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에는 다른 곳도 머물고 싶었고, 똑같은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것 말고도 하고 싶은게 많았다. 그러니깐 난, 자꾸 욕심을 냈다. 대부분이 마음을 끄는 곳이었고, 사진으로 선명하게 남기고 싶은 곳 이었다. 1일 1스케치는 이미 무너졌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았더니 가야할 곳이 없었다.
발이 아프니 이곳에 앉아 오래 머물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꿈꾸던 여행의 모습이,
몸이 아프고 나서야 이루어진 것 같아 우스웠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옆에 누군가 앉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림 그리는 나의 모습을 그려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sure'이라고 답했다.





학창시절, 음악 미술 체육 과목들은 겨우 일주일에 한두 번 남짓 들었지만, 내가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엇이든 두 손으로 뚝딱해내는 엄마를 보면, 손재주는 아빠를 닮았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키가 더 자라고 손이 커지면 엄마를 닮아 잘 할 수 있을 거라 했지만, 키와 손은 생각보다 자라지 않았고 실력도 그리 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였는지, 작은 드로잉 수첩과 연필을 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평가를 들을 필요가 없을 때 부터 였을까.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부터 였을까. 흰 종이에 검은 색 줄을 긋는다. 그 종이 만큼의 크기를 가진 세상에, 온전히 내가 만든 것이 담긴다. 그 것이 주는 기분이 좋았다.




그 사람이 나를 흘낏흘낏 바라보는 것이 느껴질때 마다 내 손이 삐긋삐긋 하는 것 같았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도 그 사람의 그림이 끝날때까지 그림을 그리는 척했다. 이윽고 그림이 완성 되었다. 프랑스 인이 본 내 모습은 어떨까 기대가 되었다. 파란색 펜으로 쓱쓱 그려낸 나의 얼굴은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너무 맘에 든다고 답했다. 서로 짧은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그 사람의 친구가 오고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 사람이 나에게 건넨 말중 하나는 art student냐는 물음 이었다. 아마 내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 때문이었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시작한 것에 대한 칭찬 같았다.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이게 뭐냐는 친구들의 장난끼 가득한 놀림에도, 그래도 온전히 그리는 것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있던 알렉산드로 다리에 들어섰다. 그 다리 밑을 지나는 센느강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저 앞에 에펠탑이 빼꼼 보였다. 등 뒤의 햇살이 뜨거웠지만 그 곳에 서서 햇빛에 반짝이는 센느강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유람선에게 오른손을 찬찬히 흔들기도 하였다. 결국은 뜨거운 햇살에 떠밀리듯 움직였다.

튈르리 공원으로 향했다. 오랑쥬리 미술관 옆에 자리 잡은 공원이라고 했다. 미술관 옆에 있기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건너니 양옆에 나무가 서있는 길이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햇살을 피해 나무의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그 길의 끝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아까 보려했지만 보지 못했던 오벨리스크가 서있었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가웠다.

아직 해가 수직으로 떠오르기 직전에 길었던 나무의 그늘이 연못 앞까지 이어져있었다. 그 그늘위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하지만 얼마안가 그늘은 점점 작아져갔고, 결국 내가 앉은 의자도 햇빛으로 밀려났다. 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겨 앉곤, 다시 그림을 그렸다. 가판대 주위에는 소풍을 나온듯한 학생들이 똑같은 파란색 옷을 입고 조잘대고 있었다.


공원이 좋았다. 그래서 언제고 앉을 수 있게 매일매일 돗자리를 가방 안에 지니고 있는거겠지만. 가만히 앉고 싶고, 가만히 눕고싶고, 밀린책들을 읽고싶고,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싶고, 그 주위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은 계속 되고 이곳에만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씩이라도 하고 싶었다. 여기서는 그림을 그렸다.










오랑쥬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모네의 수련 연작이 담긴 그 곳. 걸린 작품들은 겨우 몇개 남짓이었지만, 그 곳을 그림들로 가득 채운다하더라도 그 그림이 주는 것만큼의 압도감은 주지 못할것 같았다. 걸으면서 바라보고, 앉아서 바라보고, 중간에 서서 바라보고 양끝에 서서 바라보았다. 다시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 그림을 담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 그림과 내 그림을 함께 담고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슬슬 배가 고팠다. 파리에서는 예상치 못한 비용이 많이 들었다. 미술관안에 자리잡은 카페테리아의 가격은 너무 높았다. 그래서 정처없이 걸었다. 골목으로 가다보면 빵집하나가 나오겠지 싶었다. 오르세 미술관 근처에 와서야 빵을 살 수 있었다. 이 빵을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다시 틜뢰르 공원으로 돌아왔다. 공원에 다시 도착해서 누군가 함께 한 여행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엉망이고, 아픈 발한테 못할 짓이었지만. 아까와는 다른 자리에 앉아 빵을 한입 베어물었다.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앉아 점심을 먹는 추억을 담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앞에는 네모난 나무들로 둘러쌓인 푸른 작은 공간이 있었다. 네모난 햇살이 중간에 자리한 동상을 비추고 있었다. 네모난 푸른 들판, 네모난 햇살, 네모난 하늘을 바라보며, 있었다.


초록색 철제의자에 앉아 그렇게 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해서 혹은 배가 불러서 아니면 가야할 것 같아서, 그 이유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다시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아까 지나쳤던 오르세 박물관으로 향했다.


오르세 박물관은 그 자체로 미술 작품인 것처럼 아름다웠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 그 빛 아래 가만히 앉았다. 유명한 고흐 작품도 봤지만 대부분 그냥 발길 가는 대로 스쳐지나갔다. 욱씬욱씬 해오는 발에 가끔씩 멈추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 앞에서도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결국은 다시 처음 그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리에서는 거의 전철이나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녔다. 이 모든 거리를 내 발로 직접 걸으며 눈에 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결국 미술 작품들은 눈에 담기에 너무 지쳐있는 꼴이 되었지만.


그렇게 하루 종일 돌아 다녀 지친 몸을 끌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처음으로 버스를 탔다. 버스에 앉아 지나치는 풍경들을 보았다. 하지만 몇정거장을 가다 반대로 탔음을 알게 되었고 급하게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몸은 지치고 발은 아프고 숙소는 더 멀어져있었다. 화가 나다가도 화낼 힘도 없어 한숨을 푹푹 내쉴뿐이었다. 다시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있다보니 주위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버스를 잘 못 타지 않았으면 서있을 일 없을 이 곳. 한적한 이곳이, 노란색 줄무늬 차양이 예쁜 까페가 지친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잘 못 내릴 수 있어, 이곳에 있을 수있어, 가만히 서서 이 주변을 둘러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다시 여행자의 마음이었다



저기 내가 타야하는 버스가 다가온다.
여행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다시 기분좋게 버스에 올랐다.







8시, 늦은 오후 라기엔 저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시간이지만, 이제야 늦은 오후 같은 풍경을 주는 그 시간에, 개선문 전망대 위에 올라섰다. 파리, 에펠탑 하면 꼭 나오던 그 풍경, 그위에서 올려다 보는 곳. 가장 기대했던 전망, 오늘같이 예쁜 하늘에서 바라보고 싶은 곳 이었다.

전망대에 올라 몇바퀴고 돌았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뀌는 하늘색깔, 그에 따라 바뀌는 풍경의 모습을, 각자 다른 풍경을 지닌 이곳에서, 저곳에서 다 담고 싶었다. 10시가 되어도 환하기만 한 하늘에 반짝거리는 에펠탑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 뜬 보름달이 선명해질 때 쯤 밑으로 내려오니 완연한 어둠이었다.




다음에 개선문을 한번 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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