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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Jan 26. 2018

영화 <코코>가 전하는 삶과 죽음

죽음에 대한 따뜻한 상상이 삶을 위로한다.




<코코> 애니메이션은 멕시코라는 조금은 익숙치 않는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전-혀 귀여움이라곤 없는 해골들이 나온다. 이렇게 약간은 이상한 애니메이션의 주제는 더군다나 '죽음'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게 나를 이끌었다.


디즈니 영화를 좋아한다. 그 영화가 펼치는 상상의 나래가 무엇이든, 지닌 의미는 대부분 비슷했다. 이를 테면 행복해야 할 사람들은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살아갈만 해야 한다. 는 것들이다.


그것이 주는 느낌이 좋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내가 짧게나마 살아 보는 듯하다. 영화가 끝나도, 그런 삶이 앞으로 나에게도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지니고 있던 고민들이나 걱정들이 잠깐이나마 사라지고 해피엔딩을 맞은 주인공들처럼 '결국은 행복해질 것'이라는 무한한 기대감에 휩싸인다. 적어도 그날 밤만은 아무 걱정없이 푹 잠이 든다.



그 내용처럼 아름다운 노래들은 덤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디즈니 영화가 풀어낼 '죽음'이 어떨지. 결론만 말하자면, 역시 디즈니 였다. 죽음조차 아름답게 껴안았다.







     (*이 리뷰는 스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족, 내가 서는 그 기반



멕시코에서 매년 열리는 '죽은자들의 날'이 이 영화의 배경이며, 신발을 만드는 가업을 이어온 미구엘 대가족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이 가업은 이멜다라는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한다. 바로 미구엘의 고조할머니이다. 노래라는 꿈을 위해 가족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이멜다는 가족을 챙겨야했다. 그런 이멜다가 택한건 '신발'이었다. 이멜다는 신발 장인이 되어 가정을 꾸려나갔고, 신발은 5세대를 걸쳐 가족들의 생계수단이 되었다.


신발은 가족, 가족에 대한 사랑을 상징한다. 그리고 노래는 꿈을 상징하지만, 미구엘 가족에겐 그 꿈을 위해 가족을 버린 무책임하고도 이기적인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멜다의 남편이 떠나버린 후, 이멜다의 가족들은 마치 저주에 걸린 것 처럼, 노래를 듣지도 부르지도 않는다. 오로지 신발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신발은 이렇게 많은 가족들을 함께 할 수 있게 했지만, 노래는 이 소중한 가족들 중 누군가를 또 다시 떠나 보낼지 모르는, 그런 것이었다.


집 한칸에는 죽은 가족들을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있다. 살아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올려놓고, 꽃으로 장식해놓는다. 그 제단 맨 꼭대기 위에 있는 사진은 다른 사진과 조금 다르다. 3명의 가족 사진 같아보이지만, 한 사람의 얼굴은 잘려져있다. 바로 이멜다와 그의 딸 코코의 가족 사진이다. 그리고 얼굴을 알 수 없는 자가 바로, 노래를 위해 떠난 그 사람, 코코의 아버지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인 미구엘은 다른 가족과 달리 노래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널리 존경받는 델라 쿠르즈 가수를 동경하며 남 몰래 기타를 연주하곤 한다. 물론 가족들의 지지는 받지 못한다.



미구엘은 어느날 코코의 가족 사진에서 접혀있던 부분을 발견한다. 접힌 부분으로 가려져 있던 것은 바로 '기타'였다. 그리고 미구엘은 깨닫는다. 그 기타가 델라 쿠르즈의 기타와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미구엘은 델라쿠르즈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일 것이라 확신한다.



미구엘이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일 것이라 확신한 그 기타를 연주하자, 살아있는 상태로 죽은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저승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 처럼 어둡고 음산한 저승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오히려 이승세계보다 더 화려하고 혼잡하고 시끄럽기까지 하다. 죽은자의 날들을 맞아, 죽은 자들은 이승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마리골드 꽃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너기 바쁘다. 그 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미구엘은 이승으로 돌아가기 위해, 죽은자들과는 반대로 다리를 거슬러 올라간다.



미구엘은 왜 그 기타를 침과 동시에 저승으로 갈 수 있게 된 걸까.

그 기타의 진짜 주인, 헥터의 간절함도 있겠지만, 미구엘이 헥터의 재능을 물려받은 유일한 자손이기 때문은 아닐까. 모든 가족들이 노래를 멀리하고 가업에 충실할 때, 헥터의 재능을 이어받은 한 사람이, 가족들의 만류에도 신발 대신 노래를 택한다면, 그래서 헥터의 기타를 다시금 쳐준다면, 그 사람만이 가족들에게 외면받은 헥터를 다시 가족과 이어주는 끈이 될 터였다.




다시 미구엘이 이승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죽은 가족으로부터 마리몬드의 꽃에 축복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멜다가 내리는 축복은 다시는 노래를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미구엘은 자신의 노래까지 축복해 줄 델라 쿠르즈(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고 착각하며)를 찾아 나서게 된다.


미구엘은 가족들이 원치 않는 노래를 하려다 저승으로 왔다. 그런데 이승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축복이 필요하다. 잊혀진 가족의 재능을 이어받은 미구엘에겐, 다른 가족이 주는 축복은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가족을 피해 델라 쿠르즈를 찾아 나서는 미구엘의 모험에 한 명이 더 함께 하게된다. 아무도 사진을 걸어놓지 않아, 죽은자들의 날에도 이승으로 갈 수 없는 헥터다.







죽은 가족들은 그런 미구엘을 뒤쫓는다. 미구엘을 찾는 결정적인 계기는 미구엘의 신발이 남긴 발자국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발은 가족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발을 통해 가족들은 미구엘을 찾고, 다시 함께하게 된다.


왜 하필 '신발'일까. 아마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서 있게 되는, 또는 꿈을 향해 달려가기도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것을 '신발'을 통해 전하고자 한건 아니었을까.


결국 헥터의 이야기가 밝혀진다. 델라 쿠르즈는 후회하며 가족에게 돌아가려던 헥터의 목숨 뿐만 아니라 노래와 기타도 빼앗고 부와 명예를 독차지한, 이를 테면 악당이었다. 하지만 그 악당과의 갈등이나 악당의 몰락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아니다. 오히려 지나가는 작은 소재일 뿐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을 떠났던 한 사람의 후회와 슬픔이, 그의 노래와 함께 했던 시절을 잊지 못해 기타 사진은 차마 자르지 못했던 한 사람의 그리움이 서로에게 가닿는다.


돌고돌아 서로를 바라보게 된 이멜다와 헥터의 이야기는 뭉클하지만, 이제 미구엘은 돌아가야한다. 미구엘은 노래를 하지 못해도 좋다고 한다. 가족이 내 곁에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그 축복의 내용이 설사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못하게하는 것이라도 가족의 축복을 기꺼이 받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꿈보다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미구엘에게 이멜다는 조건없는 축복을 내린다. 결국, 가족은 서로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베푼다. 가족은 꿈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꿈이 무엇이든 지지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잊혀지는 것 그리고 죽음



죽은 자가 '죽은자들의 날'에 이승에 가서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누군가에게 잊혀지지않은 기억과 추억이 되는 것이다.


저승은 생이 다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또 다른 사회일뿐이다. 잊혀지지 않는 한, 이승과는 다른세계에서 이승과는 별다를 것 없는 생활을 이어간다. 


잊혀짐이 곧 진정한 죽음, 사라짐을 의미했다.


헥터는 잘려진 사진 때문에 이승에 갈 수 없었다. 다만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자신의 딸, 코코덕분에 또 한 번의 죽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코의 기억력이 희미해져가면서 헥터는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미구엘은 이승으로 돌아오자마자 코코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헥터가 코코를 위해 만든 'Remember me'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멀리하는 모든 가족들 앞에서, 노래를 멀리하게 했던 그 사람의 노래를 부른다.


코코가 그 옛날 그 때 처럼 노래를 따라 부른다.


헥터는 덕분에 사라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코코와 미구엘의 노래가, 잊혀진 헥터와 노래를, 가족과 다시 이어줬다는 사실이다. 코코의 가족사진이 드디어 완성되었고, 가족들에게는 노래가 돌아왔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
그 것이 삶이 죽음과 함께하는 방법이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지 않지만, 그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코코의 기억 덕분이었다. 코코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아버지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기억했다. 그 오랜시간 동안, 홀로, 병마와 싸우며 할 수 있는한 최대한 기억했다. 이 영화에서 기억한다라는 말은 사랑한다라는 말보다 더 크고 깊은 울림을 주는 것 같다.


헥터가 그토록 코코룰 만나서 해주고 싶었던 말은,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날 기억해준 만큼 널 기억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었을까.













Remember me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잠깐 나오는 코코가 이 영화의 제목인 이유는 무엇일까. 코코처럼 떠난 이를 기억하는 모든 이 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 때문은 아닐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억이 때론 고통스럽고 한 없이 슬픈 사람들에게.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그 만큼 기억하겠다는 헥터의 말로 대신 위로를 전한다.


어쩌면 그 기억 덕분에, 그리운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또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 영화의 따뜻한 상상이 우리의 삶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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