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연 Mar 24. 2018

프라하, 굿모닝 굿나잇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간기차를 탔다.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가는 여정이었다.

 

사실 기차는 서울로 학교를 다니는 몇년 동안 나의 통학 수단이었다. 그런 나에게 기차를 타는 것과 기차를 타고 여행 하는 것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기차를 타는 건 내게 일상이라 여행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몇번의 기차를 타면서, 기차에 대한 익숙함이 여행에 대한 익숙함을 뜻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됐다. 중요한 건 '또' 기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갈지 였다.


야간기차는 좀 더 특별했다. 야간기차를 탄다는 건 내가 잠이 든 순간에도 여행이 계속 된다는 걸 의미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충분히 감내할만한 것, 지금 내 여행과 비슷했다.





내가 잠시 모든 생각을 멈춘,
하루의 가장 조용한 순간에도
기차는 나를 싣고 끊임 없이 달려간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곳을
스쳐지나가면서,
잠깐이나마 살아볼 그 곳을 향해.














조금 일찍 도착한 취리히 역에서 캐리어를 옆에 두고 열차를 기다렸다. 누군가 그런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일본인이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자신의 여행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 했다. 여행이야기는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서 산 시간 보다 다른 곳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다고 했다. 계속해서 여행 중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삶이란 '여행 중' 과 마찬가지였다. 여행이 삶이 된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삶에서 이 여행은 고작 순간이지만,

그는 여행안에 삶이 있었다.



세계여행을 하겠다고, 여행하면서 이곳 저곳을 누비며 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듯 많은 것이 말에서 생각으로 그리고 닿을 수 없는 꿈으로 변해갔다. '그래, 내가 언젠가 한다니깐.' 다짐이라기엔 확신이 부족한 말로 미래에 떠넘겼다.


하지만 '미래'라는 말은 훗날 어느 순간으로 존재할 뿐 절대 다가오지 않는다. 그 과거 속 미래가 현재가 될 때 쯤 다시 또 어느 미래로 넘겨 버리면 그 뿐 이었다. 그렇게 꿈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존재하지만다가오지 않는 영원한 미래로 둔다.


그래서 '현실이라', '어쩔 수 없어서', 미래의 나에게 떠맡겼던 그런 삶을. 그 사람은 살고 있었다.



우리는 종일 긴장 상태로 지내다가 밤이 되면
마지못해 기도를 드리고 불확실한 것에 자신을 맡긴다. 또한 너무나도 철저하고 진실하게 현재의 삶을 숭상하도록 강요받으며 변화의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사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그릴 수 있는 반경의 수만큼이나 살아가는 방법은 무한하다. - 월든



그 와 헤어지고 나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원했던 삶이 저런 삶이 맞는지. 나는 왠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옆에 놓인 짐들이 무거웠고, 기차 플랫폼을 찾는 것은 어려웠고, 한식이 먹고 싶었고, 우리집, 우리 가족, 우리 강아지가 보고 싶었다. 미래의 꿈이 불쑥 현재로 다가오자, 난 다시 현실을 생각했다.


웃긴 노릇이었다. 난 여전히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다. 여기와서도 현실적인 문제는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여행에서 내가 해야할 것은 나를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 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렇게 현실적이고 겁이 많은 내가 여기에 왔다. 그리고 벌써 20일이 훌쩍 지났다

난 또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있다. 내일 눈을 뜨면 '프라하'에 도착한다. 지금도 어김없이 내 현실이다. 내 인생 중 가장 새롭고, 아름답고, 찬란한 현실들이 될 나날들을 '현재'로서 만끽하겠다. 그럼 되겠다.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관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부터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그것을 그냥 일어나는 대로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너무 쉽사리 질책의 눈길로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는 지금당신이 마주치고있는 그 모든것에 나름의 몫을 갖고 있습니다.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지금의 나가, 무수히 많은 과거의 '나'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과거 없는 현재나 미래가 없듯이, 갑자기 '전혀 다른 나'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가 이토록 행복함을 만끽 할 수 있는 건,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진 이전의 나 덕분일 지도 몰랐다.




야간기차 조식. 정말 맛은 없었다. (..)



잠을 푹 잔 것 같진 않지만 눈을 뜨고 씻기 위해 방을 나섰다. 깜깜하기만 했던 어제와 달리

복도의 창들을 통해 햇살이 비추었다.

또 다른 아침이다.


프라하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고 잠깐 피곤한 몸을 뉘운 뒤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숙소 창가를 통해 보이는 프라하의 모습이 아름다워, 피곤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프라하 자체가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중심지에서는 조금 먼 숙소였다. 그래서 까를교까지 이어진 그 길들을 직접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노래를 들으며 강을 따라 그곳을 천천히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까를교에는 그 명소를 증명하듯 엄청난 사람들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 각자 그 다리와 강과 그 뒤의 풍경을 자신의 모습과 담기 위해 카메라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건물들, 빨간 지붕, 돌길. '프라하'라는 단어가 지닌 어감이 있다. 아름답고 예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걷고 싶고.. 그런 감정이었다. 직접 가서 본 프라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기에는 불편한 돌길이지만 주변과 어울리는 길이었다. 그래서 작은 가방 하나를 매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강을 따라 천천히 걷고 싶은 그런 도시였다.

푸른 하늘 위 뭉게지어 떠다니는 구름, 그리고 그 밑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빨간 지붕들 까지.. 이따금씩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행복한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이 작은 프라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의 미소가 환했다. 지금의 프라하 처럼,






다시 어둠이 드리우고, 햇빛이 아닌 주황의 빛들이 대신하는 시간에 다리 위에 섰다. 분주한 사람들 틈으로 아름다운 노래선율이 퍼져 나간다.


여기서 프라하의 밤을 지켜본다.


누군가에게 '잘 자' 라는 인사를 건네고 싶은 풍경이다. 답장은 필요없다. 이 풍경을 보고 뒤돌아 선 뒤, 내 머릿속에 남게 될 잔상 만으로도 충분히 잘 자는 밤이 될 것 같다. 그러니 지금 떠오르는, 사랑하는 사람들도 오늘 밤 잘 자길.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 중(반)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