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가는 길
약 두 달 전, 무료하던 3월의 어느 날, 새로 온 교환학생들은 앞다투어 유럽을 정복해나가기 시작했고, 주 4일 수업에 갇힌 나만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듯한 울적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웨덴행 비행기를 결제했다. 학기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철회한 수업들과 휴강된 수업들로 갑자기 생겨 난 출발 전 이틀의 시간을 얌전히 기다리기 힘들다.
출발 당일, 여유롭게 일어났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입을 옷이 없을 것을 대비해 빨래까지 하고 널었다. 뿌듯함에 미소 지으며 섬유유연제 향이 풍기는 방문을 잠근다. 이동 중에 읽을 전자책 (밀레니엄, 스티그 라르손)도 다운로드하였고, 독일어 수업 과제물, 만약을 대비한 간식 등. 말 그대로 완벽하다.
오랜만에 공항 제1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확인하고 면세점들을 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좀 더 일찍 출발했다. 다름슈타트의 자랑, 에어라이너.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한다고 선전하지만 기만스럽게도 신호만 뜨고 인터넷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요 근래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재미가 들린 나는 반년 전 스페인 여행의 기억을 주섬 주섬 꺼내보고 있었다. 첫 라이언 에어 탑승에 긴장했던 나 자신에 미소 지으며 메모장에 글자를 치는 순간, 여권을 안 가져온 사실을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가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사실이다. 수많은 감정들이 찰나에 스쳐 지나가고, 귓가에 울리던 듣기 좋던 멜로디는 두통을 유발한다. 칠칠치 못하지만 부지런한 나는 3.80유로짜리의 순환 드라이브를 마치고, 다시 여권을 챙겨나갔다. 두 시간이 지나고 다시 탄 버스 기사의 얼굴은 전혀 낯설지 않다.
내가 땅바닥에 시간을 버린 사실이 꿈같게도 공한 의자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SAS비행기의 특징. 스칸디나비아 평균 신장에 맞춘듯한 넉넉한 좌석 간 간격을 자랑하지만 이 간격에서도 다소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또 다리가 길어서인지 착륙 후, 기내를 빠져나가는 속도가 한국인과 견주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빠르다.
승원이가 일러준 대로 나와서 왼쪽을 보고 걸으니 버스 정류장이 있다. 자정을 넘은 깜깜한 어둠 속에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짙은 비 냄새가 풍기고, 살짝 선선한 공기를 느낀다. 늦은 시간이지만 한 명 두 명 다가와 버스를 기다리는 곳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이곳의 버스는 모바일 결제 또는 카드결제만 가능하며, 현금결제는 불가능하다. 20유로 이하는 카드로 결제할 수 없다며 당장 해결책을 찾으라며 나를 압박하던 몇몇 얼굴을 떠올리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내 앞으로 먼저 탄 사람들에게 현재 기계가 정상 작동하지 않으니 그냥 타라는 말소리가 들린다. 이미 다 들었지만 깜짝 놀라는 척하며 정말이냐고 되물어보고 안타깝고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편도 만원이 넘는 여정을 그냥 탔다는 게 얼떨떨하지만 생각할수록 기분이 째진다.
도로 위에는 차들도 없고, 오직 노랗게 빛나는 멀어져 가는 이케아 간판을 바라보며 이곳이 스웨덴임을 느낀다. 승원이가 사는 웁살라. 웁살라 센트룸 역의 못해도 초겨울 같은 5월 새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기온을 체감하며 동동거리는데 이내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미래도시 같은 터널을 지나 승원이의 기숙사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올라 가는데 아까부터 하늘이 자꾸 마음에 걸린 이유는 백야 때문인 것을 알게 된다.
승원이가 부탁했던 물건을 전해줌으로써 무사히 운반책의 소임을 다하고, 손가락으로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공기가 주입되는 ‘거대’ 에어매트리스에 누워 지난 여행에서 중절모로 눈을 가리고 세상과 단절하며 잠자던 일명 ‘마이클 잭슨’을 떠올리며 껄껄댄다. 새벽 세시가 넘었지만 창 밖은 한밤의 태양으로 점점 더 밝아지기만 하고, 이에 밤을 잃은 새들이 서럽게 지저귀는 소리까지 더해지자 갈비뼈 안쪽 장기들이 납작 해지는듯한, 날 밤을 새운 아침에 느끼는 그 기분을 느낀다.
에어매트리스 위를 굴러 밤 새 나를 지탱하던 공기를 배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 경험하는 백야로 인해 늦게 잠든 탓인지 시간은 이미 정오에 가깝다. 귀국을 대비하여 웬만하며 새로운 살림을 마련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방 한가운데에 원두와 커피머신이 놓여있다. 물론 얼음도 상비되어있다.
점심으로 파스타와 라따뚜이를 만들어먹는다.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와 산지 없이 단조로운 스카이라인. 낮에 다시 본 웁살라는 미국의 거주지 지역을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