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그리스 서부: 아르고스톨리

아쉬운 점: 아쉬운 점이 없다는 점

by Terry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녁 7시 55분 이륙이지만 아르고스톨리로 향하는 버스는 오전 7시 20분에 출발하는 버스 한 대밖에 없어 새벽부터 일어나 강제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학교나 회사로 향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여행을 마무리하려는 우리는 한 버스 안에 앉아있지만 괴리감이 느껴진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버스를 한 번 갈아타는 수고를 하고 9시가 돼서야 아르고스톨리에 도착했다.


햇볕 아래의 아르고스톨리는 처음 왔을 때와는 다른 곳처럼 느껴진다. 무기력함을 달래려 7 days브랜드의 스위스롤을 먹어치운다. 7 days는 그리스의 과자 랜드인데 정말 이름 그대로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이 과자를 먹으며 브랜드 이름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강 위로 혹시 거북이가 나와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보지만 찾으러 오늘도 부재중이다.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굵기의 원두를 필터에 거르지 않고 그냥 물에 타 라면 끓이듯 끓여내는 터프함이 특징인 그리스식 커피. 한 모금 마셨을 때 같이 들어오는 가루의 텁텁함은 흡사 설빙 콩가루 빙수를 처음 먹었을 때를 떠오르게 한다.


며칠 전에도 걸었던 메인 스트릿을 구경했다. 살을 익히는 뜨거운 햇살, 그리고 쓸 돈도 쓸 마음도 없으니 이내 쇼핑에도 흥미가 떨어지고 만다.


주어진 시간은 많으나 할 일이 없다. 길바닥에 주저앉기를 여러 번. 기껏 찾아낸 일은 점심을 먹는 일. 첫날 저녁을 먹었었던 식당에 다시 가 점심을 먹었다. 역시 나쁘진 않으나 특별하지도 않다.


마음이 허전해 인사동 꿀타래와 비슷한 그리스 디저트인 카타이피 구입을 마지막으로 공항으로 떠나려는데 가방 속에 넣은 손에 느껴지는 달콤한 끈적임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포장 박스를 다 적신 꿀은 다음 표적을 모색하고 있다.


간신히 만원 버스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온 듯한 백인 노부부들이 올라탔다. 자신만 자리에 앉지 못해 화가 난 건지 원래 얼굴이 불그스름한 건지 무어라 으르렁대며 자리를 내놓으라 한다. 척 보기에도 한두 번 무례해본 솜씨가 아닌데, 저 나이 때쯤 되면 죽음 말곤 거칠 게 없으니 이상할 게 없다.


케팔로니아 공항은 아직도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며 손때 묻지 않은 새하얌을 자랑한다. 얼마나 새것이냐면 비누를 묻힌고 튼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 정도의 새것이다.


여름 한정, 그것도 일주일에 단 한 대의 직항 편이 편성되어 정해진 일주일간의 일정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동안 빠진 수업, 당장 내일부터 나가야 할 수업으로 돌아갈 생각에 괴롭지만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는 않다. 공항의자에 앉아 밀물처럼 들어온 사람들이 비행기 한 대가 이륙할 때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하지만 상황은 나의 사색은 나에게 사치라는 듯, 아까 비닐로 봉인해두었던 디저트는 그것마저 뚫고 캐리어 위로 흘러내린다.


장장 4시간의 인고의 시간, 그리고 라이언에어 탑승권을 인쇄하지 못해 느끼는 긴장감을 이겨내는 것을 끝으로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 노을 진 하늘 아래 내가 탈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모습 위로 일주일 전 버스 시간표도 모른 채 도착했던 내 모습이 곂쳐진다.


독일로 돌아온 우리는 당분간 마주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찾아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8)그리스 서부: 아소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