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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그리스 서부: 아소쓰

빗물에 씻기는 것들

by Terry

아침이 밝았다. 밤새 내리치던 비는 그 기세가 꺾였지만 여전히 날은 흐리다. 유일하게 히터가 돌고 있는 방을 호기롭게 나와보지만 이내 담요를 가지러 다시 들어간다. 테라스에서 즐기는 나와의 시간. 우연히 립톤 티백 뒤에 숨어있던 커피까지 발견해 그리스 전통 커피를 흉내 내어 에스프레소 가루 채로 가스레인지에 끓여마시니 제법 구색이 맞는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우리 외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애초에 이 주변에서 사람을 본 적이 손에 꼽는지라 불안해하지 않고 기다리다 보니 멀리서부터 천천히 버스가 다가온다. 너무 천천히 다가오는 바람에 뛰어가야 하나 고민이 되지만 표정으로 소통하기로 한다. 그리스에서는 평소에 사용하던 손동작이 욕설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 항상 손을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말로 말할 때는 여느 때보다 풍부한 손짓을 사용하게 된다.


오늘은 월요일, 아소쓰까지 가는 버스는 11시에 한대가 있고, 돌아오는 버스는 16:30에 한대가 있다. 아소쓰는 중세시대 해적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케팔로니아의 수도였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는 지리적으로 외지다는 이유로 아고스톨리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했던 곳이다. 현재는 약 100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작은 비닐봉지를 꼭 쥔 아저씨와 머리기름을 잔뜩 발라 멋을 낸 버스 기사는 가는 내내 대화를 쉬지 않는다. 버스 후방부가 가드레일을 뚫고 나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굽이굽이 진 커브길을 한 번에 돌아나가는 짜릿한 기술을 감상하며 내려가다 보면, 한창 공사 중인 길 한복판에 버스가 멈춘다. 도착이다.


이 작은 마을의 매력은 항구 주위의 제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어우러진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색은 또 어떤지, 이쪽에서는 부드러운 파스텔 색으로 당근을 주면서, 또 다른 쪽에서는 원색으로 채찍질한다. 있지도 않은 내 집을 머릿속으로 리모델링해본다.


한적하고 평화롭다. 15세기 후반 해적으로부터 케팔로니아를 지키는 소명을 가지고 만들어진 베네치안 요새로 올라가는데, 상록수가 즐비한 모습이 한국의 자연 휴양림을 연상케 한다. 공교롭게도 어디선가 돈가스 냄새가 풍겨온다. 수상한 동양인들이 킁킁거리며 위로 오른다.


채 세 걸음을 못가 멈춰서 사진을 찍으며 올라가니 오늘 아소쓰에 여행 온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앞질러간 듯하다. 목적지인 요새에 다다랐는데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다. 괜찮다. 높은 곳에 올라 바라 볼 예쁜 마을 풍경을 보러 온 것이니. 정확히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나 있다. 망망대해를 뚫고 쳐들어오는 적군을 방어하기만 좋은 위치군.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올라왔던 길 반대로 난 돌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의 발의 모든 지압점을 한꺼번에 지압하는 돌 덕택에 온 몸의 병이 나아가는 것을 느낀다. 회복의 과정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한참을 내려가고 나서야 길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간다.


점점 거세진 빗줄기는 가게에서 쳐놓은 천막을 뚫어버릴 기세로 내리고 있었고, 그것은 희미한 돈가스 냄새 모두를 흔적도 없이 내려 앉히기 충분했다. 비는 우리의 엉덩이를 채찍질해,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자식으로 나올법한 거구의 청년이 주문을 받아갔다. 그가 자라남에 따라 적어도 그 식당 안에서의 범죄율은 함께 감소했을 것이다. 천지에 널려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다가와 내 우산 속에 고양이가 오줌을 갈겼다고 일러준다. 우산을 펼쳤을 때의 결과를 고려한 영리한 위치 선정에 이들의 실제 지능이 얼마인지 의심스럽다.


다시 돌아간 버스 정류장에는 아까 타고 왔던 버스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똑같은 운전기사와 그 옆의 버스기사 말동무를 해주던 아저씨. 벌써 두 번째 마주침에 아저씨의 눈빛과 미소에서 흘러나오는 친절함은 한층 더 진해져 있다.


*온종일 영국 패션 스토어 ASOS가 아소쓰 섬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인가 궁금해했었는데 ‘As Seen On Screen’의 약자였다.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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