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중요성
공식적인 리디아 투어 일정은 끝났지만, 원한다면 미르토스 해변까지 차로 태워다 준다고 말한다. 기대했던 전개이지만 놀라 감동받은 척을 잊지 않고, 숙소로 뛰어들어가 옷도 갈아입고 이것저것 일단 챙겨 나간다. 라디아는 너그럽게 창고에 있는 파라솔과 돗자리까지 내어주었고, 우리는 빵빵한 가방을 들고 6분 남짓 소요되는 내리막길을 지나 미르토스 해변가에 안착했다.
우선 배를 채우기 시작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대체로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해변가에 널브러져 있고, 극소수만이 물가 근처에서 거닐고 있다. 배를 좀 채우자 물에 들어갈 마음이 생기고 수영복을 대신하는 잠옷 차림이지만 조심스럽게 입수를 시도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바닷’ 물에 들어가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패기 넘치던 젊은이 시절, 밤바다 수영이 심장 건강에 좋다는 짧은 기사를 보고, 한겨울 속초여행에 오리발까지 챙겨갔었다. 희수에게 모래사장에서 여차하면 119에 신고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당부한 후, 종아리까지 바닷물에 집어넣고 나서야 깨달음이 찾아왔고, 바로 나왔지만 그럼에도 꽤 오랫동안 가려움으로 고생했었다. 그 젊은이의 패기는 다소 줄어들어, 발목을 감싸는 얼음장 같은 손아귀에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 와중에 내 발바닥은 서로 지압하겠다며 아우성치는 조약돌들로 고통받는다.
해변가에 새로 등장한 두 사람은 파도의 영향권을 넘어가 머리 내놓은 채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다. 재시도. 그곳은 발이 닿지 않는 수심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수온은 점점 차가워져 붕 떠있는 기분이 드는 곳이다. 강제로 고농도의 소금물로 호흡계통을 정화하면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누워있다 뭍으로 나오면 실제 물속에서 있었던 시간의 약 20배 정도의 시간 동안 급류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 돌아온 기분이다. 인간의 진화 방향을 역행하는 모습으로 두발로 걷다 점차 네발로 기어 조약돌 더미에 몸을 뉘인다. 심장은 터질 듯이 빨리 뛰고 숨은 차오른다. 입안은 마르고 콧구멍은 시리다. 김장철에 절여진 배추의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절인 배추가 적성에 맞는지 이를 여러 번 반복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는 예상했던 위기를 직면한다. 숙소까지는 거의 산 하나를 빙 둘러 올라가는 길로 45도 경사를 45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세 번의 자진 표류로 이미 다리 근육들은 잔뜩 숨이 죽었지만 살아있음을 알리듯 멋대로 떨려온다. 마음속으로는 스쳐 지나가는 모든 차에게 히치하이킹 제안을 했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다. 중간쯤 올랐을까.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 거짓말처럼 정차하더니 (10)트럭 운전석에서 ‘선한 그리스인’이 고개를 내민다.
“Do you guys need a ride up to the hill?”
상상만 하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눈과 한껏 솟아오른 광대, 제어할 수 없는 기쁜 표정을 하는 것도 잠시 행여 마음이 바뀔 새라 yes를 오ㅚ치ㅣ며 냉큼 트럭 위로 올라탔다. 트럭 뒤에는 일행 두 사람이 이미 타있었고, 이들은 주말 맞이 해변가에 놀러 나온 케팔로니아 청춘들. 그리스 사람들은 다 친절하다는 말에 미소 지으며 한 청년이 대답한다.
“You know why? It’s because of the Klíma(climate)”.
날이 밝고, 전날 일찍 잠들어 12시간 이상 잤지만 구름 낀 날씨 때문에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썩 내키진 않지만 원래 계획대로 다시 미르토스 해변으로 향한다. 확실히 내리막길은 수월했고, 해변가에 무사히 도착했다. 싸들고 온 음식을 다 먹으니 더 이상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고, 누워서 잠이나 청하려는 찰나에 다리에 느껴지는 축축하고 따뜻한 느낌. 빗방울이다. 이곳에 온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점점 짙게 풍겨오는 비 냄새. 날씨가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판단하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마지막이 될 해변가의 모습을 담은 뒤, 오르막길을 오른다. 내려오는데 30분, 해변에서 15분, 오르는데 45분. 비는 오지만 기온은 높아 금세 얼굴과 목덜미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혹시 오늘도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한 발 한 발 오른다. 왜 어제는 되고, 오늘은 안되는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1. 후에 사진으로 확인한 것으로, 어제는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살짝 곁눈질로 봐도 바닷물에 젖은 무해하고, 차 없는 불쌍한 투어리스트였다. 반면 오늘은 발끝조차 물에 닿은 적 없는 건조한 상태.
2. 오늘 같은 날씨엔 현지인들은 해변가에 나올리가 만무하며, 투어리스트들은 위험한 행동을 굳이 하지 않는다.
숙소가 눈에 보이는 거리까지 도달할 즈음의 난 눈치 없이 신나게 울리는 노랫소리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줄어든 말수와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정도 끝이 나긴 한다.
잠시 땀을 식힌 기억을 끝으로, 다음 기억은 밥 먹으라는 소리에 눈을 뜬 것. 비몽사몽 한 상태로 막대한 양의 밥을 먹고 나서도 피곤이 몰려왔지만 게임은 포기할 수 없다. 낮에 해변가에서 주워 온 조약돌로 하는 보드게임, 같은 조약돌을 이용한 공기. 애송이가 건방지게 내기를 걸어온다. 한때 공기로 한 학급을 제패했던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승리는 언제나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