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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근열차”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갔다. 스톡홀름 지하철 역사는 천 개의 미술관이라고 불릴 만큼 역 하나하나가 다른 테마로 꾸며져있다고 한다. 이곳은 거대한 규모의 시퍼런 굴처럼 생겨, 상형문자 같은 게 그려져 있어 긴 에스컬레이터를 짧게 만들어버린다. 또한 이곳은 ‘시민’이 이용하기에 흔한 오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명예 스웨덴인의 소개가 이어진다. 출구를 찾아 나가는데 문이 안 열려 띨띨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반대편에서 망설임 없이 다가와 문을 열어주려다가 문이 잠겼다며 유창한 영어로 말해주는 백발의 신사분. 내가 상상하던 선진국이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아크네 스튜디오 아카이브. 살 수는 없어도 볼 수는 있지 않냐며 들어갔는데 이내 난해해 보이던 옷들이 실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승원이의 부추기는 소리와 내면의 소리를 잠재우며 결정을 보류했다. 다시 연이 닿기를 바라며.
말 그대로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시립 도서관에도 예의상 들어가 보고, 본래의 계획을 실행한다.
스톡홀름 사람들은 패션잡지 안에서 사는 건지 전부 그곳에서 걸어 나온 것 같다. 특히 빈티지 패션의 정수를 보여주는데, 이에 스톡홀름에 곳곳의 빈티지샵이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들의 옷걸이를 훔칠 순 없겠지만 우리도 새컨핸드샵을 구경하고 있는데 얼마 안돼 토요일이라 네시에 문을 닫는다고 해 다음을 기약한다.
버블티를 요란하게 빨며 또 다른 새컨핸드 브랜드인 Beyond Retro에 들어가 마감을 알리는 방송을 들으며 옷을 휘뚜루마뚜루 들춰보고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가 들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떤 스웨덴 사람이 승원이가 입고 있는 치마를 보고 어디서 샀냐고 용기 있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태연하게 자신의 옷 태그를 보여주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은 기분을 느낀다.
비교적 늦게 닫는 망고나 호엠(본점!)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다시 웁살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날씨만큼 차가운 외식비용에 대비하여 대형마트에 들러 앞으로의 식량을 구비하기로 한다. 여기 마트의 문턱을 넘자마자 한없이 너그럽고 관대해진다.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동동대는 승원이를 보며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니 걸어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계산을 마치고 장바구니를 드는 순간, 내가 원하는 건 버스 오로지 하나다. 제멋대로 오간다는 노란 버스는 다행히도 이번에는 늦게 오는 것을 택했다. 광활한 꽃밭 앞의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우리들 머리 위로는 비가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진다.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여기저기서 무질서한 괴성이 울려퍼진다. 밤 열 시마다 창 밖으로 소리를 질러 스트레스를 분출할 수 있게 하는 전통 ‘the Flogsta scream’이다.
돌아오자마자 저녁을 해 먹었다. 마늘, 양파, 고기를 쌈에 싸 먹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부엌에 왔다가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자신의 궁금증을 길게 늘어놓고는 떠난다. 그는 우리가 흉기가 가득한 이 부엌에서 배고픈 상태가 아니었던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볼 때마다 놀라운 높이의 에어매트리스. 위에 누워있으면 조금씩 바람이 빠지는지 절대 예상할 수 없는 곳들이 밤 새 매트리스 안에서 주먹으로 치는 것처럼 튀어 오르지만, 피곤과 배부름으로 무력화된 나는 곤히 잠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