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에 살면서 겨울 스포츠를 못하는 것은 유죄다.
3월 9일
“You know, it’s just once in your lifetime thing.”
숙소에 비싼 값을 치른 만큼 이곳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을 온전히 누리겠다는 둘은 그 시작으로 조식을 선택했다. 일면식도 없는 주인에게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빵과 잼, 시리얼로 소박하게 차려진 음식을 축내며 거나한 만찬을 즐긴다. 라즈베리 잼은 빵을 끝없이 들어가게 하는 마법의 잼이다.
널찍한 식당 한 편에는 독일인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아 묵묵히 세 접시쯤 비워냈을까.
“여기 앉아도 되니?”
반삭 한 머리, 주목할 수밖에 없는 형광색 입술, 과감한 의상과 주얼리를 걸친 중년의 힙스터가 물어왔다. 자신 부부는 뉴욕에서 왔으며, 이곳까지의 교통편이 결코 용이하진 않았지만 오로라 보기 위해 감수하며 왔단다.
“You know, it’s just once in your lifetime thing.”
무심코 던진 그 말은 다시 한번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하며,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좋은 걸 봐버려 더 이상 이런 감정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풍경을 보러 가자기에 갔고, 사진을 찍어준다기에 찍었는데 다음날 그것에 대한 비용이 청구되었다며 힙스터 부인은 이곳 직원들이 권하는 것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준비된 커피 캡슐 4종 중 3종을 마신 후에야 우리도 일어났다.
숙소의 스노우 슈트를 빌려 입고, 스노우 슈즈를 빌려 신고, 주인집 옆에 쌓여있는 숙소의 썰매를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대뜸 문이 벌컥 열리며 주인이 나온다. 어딘가 느끼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그 모든 걸 잊게 만들 만큼 순수하고 매력적이다. 조식에서 들은 경고를 떠올리며 주인이 추천하는 투어 프로그램에 쉽게 현혹되지 않으려 하지만, 눈동자 때문일까, 그가 정말 진심으로 우릴 위해 추천해준다고 믿게 된다. 또 귀여운 고양이와 아이를 키우는 이 남자가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다. 덕분에 내일의 할 일이 생겼다.
각자 썰매를 끌고, 내리막에 섰다. 내 썰매는 큰길을 놔두고 예외 없이 가쪽의 눈덩이로 곤두박질친다. 이를 불쌍히 여긴 승원은 자신의 썰매를 빌려준다.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속력에 동심으로 되돌아간다. 단 몇십 초간의 재미를 위해 오르막을 올라가 내려오길 반복한다. 우리를 본 힙스터 부인과 남편은 지나가던 길을 멈추고 흐뭇한 미소를 보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썰매를 잠시 정차시키고 본 내리막길 아래에는 말을 키우는 가정집이 있었다. 개를 산책시키고 있는 가정은 나도 모르게 나의 소망을 실현해놓은 듯 보인다.
시간이 멈춘 듯한 티피에도 잠시 들어갔다가, 음식들이 치워진 식당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미처 치우지 않은 바나나와 아까 마셔보지 못했던 커피를 마신다.
썰매를 반납하고, 크로스컨트리를 시도한다. 스키도 타보지 못한 나에게는 크로스컨트리는 너무나 높은 장벽이었을까. 내 발의 길이가 적당함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기분만 내고 이내 플레이트를 벗어재끼고 폴을 집어던진다.
아침부터 그렇게 커피를 마셔댔건만 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액티비티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우리는 어느새 잠에 빠진다. 밖에서 나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마침 나를 부르는 승원의 목소리에 안 잔 척 일어나 자쿠지를 하러 나가기로 한다.
창문으로 자쿠지에 있는 사람들이 나오기만을 예의 주시한다. 그들이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후다닥 자쿠지에 들어갔다. 주인집 앞에는 전문 카메라 장비를 챙겨 든 독일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보니 오늘 오로라가 보일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게 언제일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맙소사. 자쿠지 안 우리들의 머리 위로 오로라가 생겨난다. 우연의 일치가 만들어낸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순간이다.
가지고 있는 방한 용품으로 무장을 하고 나간 전망돔에는 이미 서너 명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재잘거리고 있다. 저 멀리 선명한 오로라와 전망돔 사이에는 구름 하나가 걸려있어 아쉬움을 자아낸다. 아마 아까 급히 차에 탄 장비를 든 사람들의 목적지가 저곳이었겠거니 짐작한다.
포르투갈어(추정)로 말하는 이들의 대화를 상상의 악보에 음을 찍어보니 쉼표 없이 스타카토만 이루어진 음악이다. 이러한 배경음악에 돔 안은 오로라의 감미로운 선율을 감상하기 최악의 환경이 되어버린다.
오로라가 사그라들고, 제발 나가라는 우리의 텔레파시를 읽은 것인지 그들은 이내 돔을 나간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찬 공기와 함께 돔을 드나들며, 여기저기 플래시 라이트를 비추는 사람이 다시 신경을 거스르기 시작한다.
오늘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자정이 넘어서도 쉽게 숙소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승원의 열정을 따라가고 싶지만 점점 더 얼어붙어가는 발은 내 열정의 불꽃이 일어날라치면 꺼뜨리기에 급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