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nerfest: 하이너의 마지막 관문

우리 다음 생에는 브레이크 댄서로 태어나자

by Terry

겨울학기 교환학생에게 크리스마스 마켓(Weinachtsmarkt)이 있다면 여름학기 교환학생에게는 5일간 열리는 Heinerfest가 있다.


Heiner란 다름슈타트 내의 특정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라고 들었다. 여기저기 Berliner이며, 가능하다면 Scandinavianer가 되고 싶다고 떠들어댔지만 하이너페스트가 열리는 5일 동안은 누구보다도 성실히 축제를 즐기기로 한다. 월 생활비가 이체된 월초, 시험도 끝났고,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경험자들이 말하기로는 다름슈타트 시내 전체에 차량이 통제되며, 놀이기구들과 각종 부스들이 설치된다고 했지만, 축제 전날까지도 몇몇 부스들을 제외하면 평상시와 별반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1일 차 (2019/07/04/목)

찌는 듯이 덥지만 축제의 기대감을 이기지 못하고 해가 지기 전에 밖으로 나와 채민 언니를 만났다. 버스는 빙 돌아서 운행했으며, 거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놀이기구들이 설치되어있었고, 더위를 피해 은둔생활을 하던 하이너들은 이날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거리에 넘쳐났다.


탐색전이다. 어디에 어떤 놀이기구들이 있는지, 어떤 음식들이 있는지를 보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낸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슬러시를 사 먹으며 더위를 잠시 잊었다. 평소 사행성 게임에는 1원도 쓰지 않겠다는 나의 아버지의 사상이 그대로 스며들어 같은 사상을 갖고 있는 나는 웬일인지 오늘은 다트 던지기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처음 이 축제를 맞이했을 때,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당시 지현언니는 어학원이 끝나자마자 혼자 바이킹을 탔다는 지현언니의 퇴근을 기다렸다. 곧장 바이킹으로 향한다. 단조로운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몰아치는 스릴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브레이크 댄서. 얼마 전 작게 열린 messe에서 본 놀이기구다. 디스코 팡팡을 탄 뒤라서 탑승을 거절했었는데 오늘은 춤추고 싶은 기분이다. 표를 살 때까지만 해도 과연 가치 있는, 합리적인 소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한바탕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나니 확신이 섰다. 뒷목에 느껴지는, 헤드 스핀을 몇 바퀴 돌리고 난 듯한 느낌에 이 기구를 브레이크 댄스라고 명명한 사람의 센스에 감탄하게 된다.

동심 파괴 이차원 피카츄

양지에서 회포를 풀며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한다.


2일 차 (2019/07/05/금)

뒷목이 아직도 뻐근하다. 채민 언니도 힙색에 배긴 등의 고통을 호소한다. 다정, 혜미, 채민 언니와 함께하는 2일 차는 사행성 게임이 핵심이다.


파쿠르라는 놀이기구를 시도했으나 브레이크 댄서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우리는 그 아쉬움을 채우러 다시 브레이크 댄서에 올라탄다. 놀이기구가 시작하기 직전,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가 나에게 윙크를 한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할 수 없지만 놀림감이 되고 싶진 않다는 생각에 태연하게 나도 윙크로 맞받아쳤다. 웃으며 내 뒤를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그녀의 윙크 수신인이 앉아있다. 애써 그녀를 외면하며 빨리 놀이기구가 시작되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특히 다정언니는 여러 사행성 게임에 유능했는데, 코인을 넣어 칩을 조금씩 밀어내 따내는 게임, 구멍에 공을 넣어 모형 말을 질주시키는 경마게임, 지렛대로 개구리 던지기, 사격에 인형 뽑기까지 이 분야 게임의 큰 손이었다.


어제 하던 다트 던지기를 마저하여 십시일반 모은 칩을 귀여운 스케이트 보드로 교환했다. 처음에는 내가 소질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도하는 사람 모두 이상한 느낌을 받는 것을 보니 어딘가 고장 난 스케이트 보드임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맥주를 한잔씩 걸친 채 이걸 타니 타는 족족 웃긴 일이 생긴다. 특히 채민 언니는 소중한 손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학교 도서관 매점에 잠시 더위를 피해 숨어있다가 이곳 축제의 자랑이라는 직화 스테이크를 먹으러 나섰다. 맛있는 건 국적을 불문한 터라 이미 가게 안은 북새통이었고, 구석 자리의 스탠딩 테이블에 겨우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엄청나게 큰 그릴을 끈에 매달아 덩어리 고기를 쉴 새 없이 구워내지만 직원들은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합리적인 가격을 떠나 스테이크라는 음식을 먹어 본 지 너무 오래된 터라 감회가 남다르다.


스케이트 보드는 방에서 화장실까지 갈 때 유용한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3일 차(2019/07/06/토)

다시 나갈 채비를 한다. 삼일차가 되니 어쩐지 초연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탄 나는 정류장 이름이 낯설어 당황한 나머지 후다닥 내려버렸다. 알고 보니 시내를 돌아가느라 그냥 그 버스에 타 있었으면 되는 거였지만 이미 내렸으니 2km 남짓을 걸어 약속 장소로 향한다. 오늘따라 눈에 걸려 오랜만에 신고 나온 앵클부츠에 2km는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채민 언니를 포함한 친구들과 바이킹을 탔다. 사람이 많은 탓에 처음으로 일반적인 방향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앉아 타야 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뒤를 돌아봐야만 심장이 조금 두근댄다.


브레이크 댄서로 향했다. 하이너 페스트 약 두 달 전에 갔던 메세에서 부경 오빠는 브레이크 댄서를 타고난 후,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고통스러워했었다. 그때의 일을 잊은 것인지 자신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승부하여 극복하려는 건지 다시 브레이크 댄서로 가고 있었다. 내려와 물어보니 같은 기구인지 몰랐다고 말한다. 반면 중독의 늪에 빠진 나는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차에 올라타 있다.


그동안 엄두가 안 나고, 가장 비싸 미뤄뒀던 달 탐사를 하기로 했다. 아폴로 13호로 말할 것 같으면 이 기구가 돌아가는 영상을 보자마자 아버지가 절대 타지 말라고 했을 만큼 위협적인 놀이기구였다. 긴 줄을 기다려 아폴로에 앉은 나의 손바닥은, 기구가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반년이 넘은 지금도 그 기구를 탔던 경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땀이 맺히고 있음이 놀랍다.


아폴로 13호는 예정대로 발사되었고, 기구의 큰 축이 돌아가는 동시에 좌석 또한 함께 돌아가기에 무섭기보다는 끝없이 추락하는 악몽의 느낌이 강했다. 기구에 올라탈 때 또는 기구에서 내릴 때 중 한 번은 허공에 매달린 채 다른 한쪽의 사람들이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 사람들이 내리는 단 몇 분이 나에게는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애써 긴장을 풀어보려고 해도 저 멀리 내 기숙사 건물까지 보이는 높이에서 바둥대고 있으려니 낑낑대는 신음이 흘러나오며 당장이라도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기구 설계자는 그 한계점을 정확히 계산하기라도 했는지, 다행히 그전에 땅에 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땅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허풍 떨기를 멈추지 않는 나.


저녁으로 벨기에식 감자튀김을 먹고 마음을 안정시켰지만 오늘 더 이상의 놀이기구를 타기에는 무리다.

대신 라츠켈러에서 맥주를 한잔 걸치고, 비를 맞으며 살사 공연을 찾아가 흑역사 하나를 만든다.


4일 차(2019/07/07/일)

교회 수련회 관계로 수련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체력에 한계를 느꼈지만 모처럼 활기찬 다름슈타트를 더 누려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일으킨다.


다정, 혜미 언니와 양지 요리사 아저씨와 함께 도박을 하다가, 어딘가 허전함을 느낀 다정언니와 나는 채민 언니를 찾아 나선다. 과외를 하고 있는 채민 언니 학교에 무턱대고 도착해 사진 몇 장을 전송했다. 학생을 통해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해왔지만, 우리는 캐러멜 팝콘으로 깜찍한 학생들의 환심을 사며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며 채민언니를 기다린다.


과외가 끝나고 연습을 해야 한다는 채민 언니를 지켜보고 있는 두 쌍의 눈에 언니의 손은 점점 빨라지고, 결국 우리와 함께 하이너 페스트로 향한다.


브레이크 댄서를 타고나서야 채워지지 않던 허전함이 채워진다.


지나가다 본 프로즌 요거트 가게. 발길을 멈추고 맛을 본다. 내일 또 나와야하는 이유가 생겼다.


5일 차(2019/07/08/월)

마지막 날이다. 사흘 동안 차곡차곡 쌓인 피로는 잠시 뒤로한 채, 다시 거리를 배회한다.


어젯밤 세워둔 계획에 따라 프로즌 요거트를 먹고는 또다시 브레이크 댄서로 향했다. 아쉽다. 마지막 날인 탓에 사람이 몰려서인지 처음 탔을 때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타보지만 끝내 브레이크 댄서는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첫날 내가 사서 먹고 남은 팝콘을 가져가 다 먹었다며 채민 언니는 캐러멜라이즈드 아몬드를 사줬다. 하이너페스트 위시리스트에 또 한 줄이 그어진다.


위시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 벨기에 감자튀김

- 초코 츄러스

- 수제 아이스티

- 프로즌 요거트

- 캐러멜라이즈드 아몬드

- 캐러멜 팝콘

다름슈타트 시장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비용 대비 운행시간이 가장 긴, 가성비가 가장 좋은 놀이기구는 바이킹이었다. 현재 가성비를 최고 가치관으로 여기는 진호는 4인 요금 할인을 적용받기 위해 앞에 서있는 두 명을 섭외했다. 젊음의 패기에 감탄하며 마지막 바이킹을 즐긴다.


축제의 마지막은 불꽃놀이다. 주변을 서성거리며 불꽃놀이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얼굴들도 불꽃놀이를 위해 나와있었다. 기대감은 점점 커졌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침을 뱉는 모욕적인 불꽃놀이다. 어딘가 뒷심이 부족한 불꽃들은 얼마 날지 못하고 금세 고꾸라져버린다. 어떤 강력한 한 방을 기대하며 눈을 떼지 않았지만, 반전 따윈 없었다.


프로즌 요거트 가게는 문을 닫았고, 브레이크 댄서는 이미 빠르게 철수하고 있었다. 길을 잃은 나는 늦게까지 여는 가게에 들어가 차를 마신 후에야 비로소 축제가 끝났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매일 함께 개근해준 채민 언니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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