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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 서부: 케팔로니아 피스카르도 야경투어

다름슈타트 코콜라 젤라또 아이스크림 한 스쿱: 1.40€

by Terry


발만 담그려다 실수인 척 담가버린 바지를 입은 채로 볕에 말린다. 학창 시절 민방위 훈련날 집에 일찍 돌아가는 길, 언제라도 사이렌이 울릴 수 있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나른한 오후의 느낌. 피스카르도. 들어본 적도 없는 지명이지만 리디아가 손수 정리해 놓은 모아놓은 투명A4파일에서 본 내용만으로도 나를 매료시키는 듯했다. 다행히 내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완력은 잠시 넣어두도록 한다. 약 한 시간 전 신청한 투어 차량을 도착할 시간이 지날수록 작은 승용차에도 미어캣마냥 경계를 풀지 못한다. 마침내 탑승한 투어버스. 겉옷이 필요할 정도로 시원하고 쾌적한 내부, 여기에 울려 퍼지는 더 쾌적한 가이드 네이티브 영국 영어. 마지막으로 탑승한 우리는 이 버스 탑승객들의 평균 나이를 줄이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었지만, 이 사실이 무색하게 금세 곯아떨어져버린다.


피스카르도는 케팔로니아 섬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1953년 케팔로니아 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진 다른 도시들과 달리 당시 건물들이 90% 이상 보존되어있고, 이에 따라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유적들도 남아있는 곳이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항구를 따라서 늘어선 레스토랑과 카페,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 당장 영화배우와 종업원이 출연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배경지로 손색없다. 젤라또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2€에 파는 대담함을 통해 금세 인기 관광지임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적당히 한적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건물만 나타났다 하면 진정 이게 오래된 건물인지를 유추하며 온 섬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잡초를 헤집고 들어가 음산한 폐교에 들어가기도 하고, 호텔 대문도 기웃거린다. 곳곳에 핀 들꽃, 선인장,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계속된다. 가이드가 추천했던 등대를 가보기 위해 숲을 지난다. 인적이 드문 소나무 숲을 지나면 초등생 시절의 내가 찰흙으로 만든 작품을 전문가가 구워 주웠던 것과 유사한 16세기에 지어진 베네치아 등대가 나타난다. 더 들어가면 또 다른 등대가 나타난다. 이쯤 되면 가이드가 추천한 것은 등대가 아니라, 항구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건물들의 야경, 그리고 부드러운 노을이었다는 깨닫게 된다.


큰 바위에 걸터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마트에서 산 피자맛 베이크롤을 먹는다. 분위기에 못 이겨 인생의 방향성을 서로 나눠본다. 우리를 일으킨 건 시커먼 모기의 날갯짓. 다시 버스를 탈 때 알게 된 사실로, 우리와 함께 온 사람들 중 등대에 갔다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이로써 두둑한 지갑으로 살 수 없는 것을 하나는 가졌단 사실에 당당해진다.


워낙 좁은 섬이라 메뉴판에 (견물생심이라)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는 우리의 모습을 이미 여러 번 확인한 종업원들은 들어오라는 빈 말도 하지 않는다. 어쩐지 더 자유롭다.


가장 나중에 버스에 오른 우리는 돌아갈 때는 가장 먼저 내린다.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가는 내리막길을 뛰어내려 가는데, 뒤에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듣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나는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 내막이 심히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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