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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Oct 07. 2019

(4)영국: 브라이튼 이스트 딘

난 벌침 알레르기가 없다.

 깜깜한 이른 새벽 6:30 am, 난데없이 라이언킹 OST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선착순 뮤지컬 데이 티켓을 혹시라도 사러 가고 싶을까 봐 맞춰놓은 배려의 알람이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뮤지컬을 안 봐도 괜찮다는 말을 잠꼬대처럼 허공에 뱉어낸다.


 아침부터 어제 보로우 마켓에서 산 ‘수제’ 메이플 피칸 치즈케이크를 먹은 나를 제외하고는 둘에게서는 선뜻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풍긴다.


 오늘은 런던 근교의 항구도시, 브라이튼에 있는 해안절벽에 가기로 한 날이다. 철저한 사전 조사의 내용과 다른 기차표 가격에 설명이 필요하다. 또 왜인지 역 사 내 사람들의 옷차림도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확인 결과 오늘은 브라이튼에서 프라이드 축제가 열리는 날. 베를린에서부터 가슴 속 깊이 간직해놓은 소망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더욱 설레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점심으로 먹을 버거킹 햄버거 세트와 기차에서 마실 커피를 샀다. 아침을 사 온 둘은 본래의 유순함을 되찾았고, 우리는 순조롭게 기차에 올랐다.



... 닦아도 닦아도 왜 자꾸 커피 자국이 생기는 거지. 종이컵의 접합 부분 녹아내리고있는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댐처럼 위태롭다. 바쁜 여정에서 숨을 돌리는 여유로운 콘셉트로 마시려던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을 수밖에 없다.


 얕은 지식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다 얼핏 뒤로 뛰어 나가는 강렬한 분홍 머리칼을 보고 따라 내릴 수 있었다.


 이곳의 실정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더 어색함을 느끼게 한다. 철저한 사전 조사가 아무 소용없어지는 순간이다. 퍼레이드로 인해 버스가 기차역까지 오지 않아 퍼레이드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흐르는 땀에 왜 사람들이 옷을 벗었는지에 대한 기능적 측면 보이기 시작한다.


 즉석 복권 모양의 일일 권을 사서 겨우 버스에 올랐다. 생각보다 긴 한 시간 가량의 여정에 감자튀김과 환타는 바닥을 드러냈다.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아까 들이부은 커피와 환타에 대해 책임을 져야  시간이다. 해안절벽에 위치한 화장실만 믿고 3 정도 걸었을까. 절벽까지 20 정도 걸어야 한다고 무심코 던진 채민의 말에  따뜻하지만 냄새나는 미래가 그려졌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울타리라도 뽑을 각오로 들어서려  곳은 가정집 마당이었고, 다행히 마당에 나와계신 아저씨께서는 친절히 해우소로의 길을 안내해주셨다. 다시 일행에게 돌아가는  모습은 가볍고 어딘가 당당하기까지 하다.

비움의 미학


 해안 바람에 지금 이 순간도 가파르게 조각되고 있는 그곳, 약 7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세븐 시스터즈 클리프(seven sister's cliff)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강한 햇볕이 모두 구름에 가려져 눈이 부신 흐린 하늘이다.


 오늘 사람이 많은 건지, 항상 붐볐지만 한국인들의 사진 실력이었던 경지에 다다른 건지 넓은 언덕 사방엔 사람들이 흩뿌려져 있다. 유랑으로 인연이 닿아 오늘 만난듯한 6명의 한국인들을 구경하며 언덕에 앉아서 남은 햄버거를 먹는데 나를 가만두지 않는 벌이 있다. 이때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기분 나쁘게 사람처럼 웃는 갈매기는 사건의 복선이었을까.



 천천히 언덕 위 편으로 올라간 나를 맞이한 건 쓰레기통이 없어 버리지 못한 햄버거 포장지에 병적인 집착 증세를 보이는 말벌 한 마리. 수동적인 방어 태세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재킷을 휘두르는 순간, 네일건과 같은 위력으로 나를 쏘는 벌침에 나는 날 것의 외마디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나는 근 20년 동안 벌에 쏘여본 적이 없고, 그건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 추후에 알게 된 거지만 벌침을 쏘면 장렬히 전사하는 꿀벌과는 달리 말벌은 여러 번 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셋은 침이 보이지 않아 어리둥절하며 이곳저곳 카드로 긁어보고, 급한 대로 머리끈으로 혈액 순환을 차단해본다. 여행자 보험이 만료되어 병원은 선택지에 없다.


진짜 친하다.

 마지막이 될 거라는 것을 예감하고 단체사진을 찍고, 씁쓸하게 언덕을 내려갔다.



 벌에 쏘였다고 하니 푸른 눈의 직원이 얼음팩을 가져다주며,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면 언덕에서 여기까지 내려오지도 못했을 거라며 안심시켜준다. 그리고 덩그러니 묶어놓은 머리끈은 치워도 된다고 말한다.


 객관적인 소견, 돌아가는 버스의 부재로 절벽 아래의 해안가로 갔다. 발가락 사이에 모래 낄 걱정이 없게 돌로 이루어진 해변가. 아까의 응급했던 상황, 어딘가 어리숙한 대처를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다시 축지법을 쓰지 못하는 채민 언니를 배려해 한참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고, 입석 버스에 올랐다. 축제가 끝나서인지 버스는 반짝거리는 바닷가를 지나 우리를 내려준다. 퍼레이드를 하던 큰길을 제외하고는 골목골목 끝난 축제의 열기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이 배회한다.


기차를 타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간다. 축제의 흥이 가시질 않아 눈이 풀린 청년도 다 같이 부르는 아바 노래엔 자연스럽게 동참한다. 그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런던까지 가는 동안 옆자리 숙녀의 번호까지 받아낸 생산적인 사람이었고, 소름 돋게도 우리보다 어렸다.


기차표를 어디다 뒀는지 찾는 내 앞을 당당하게 지나쳐 기차표 대신 오이스터 카드를 찍고 나간 채민 언니를 끝으로 브라이튼 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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