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 다른 시간
1666년 빵집에서 시작된 불길이 런던을 불태울 때, 속절없이 불타는 펍을 바라보는 주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한 줌의 잿더미 사이에서 자신의 가게에 해적들이 숨겨놓은 금은보화를 발견했을 땐 또 어땠을까. 그 가게 앞을 지나는 내 마음은 박물관에 가기 싫다는 마음이다.
나의 강한 입김으로 박물관을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의 중용으로써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을 가기로 한다. 템즈 강을 따라 테이트 모던으로 가는 길. 타자기 하나만을 꺼내놓은 채 그 자리에서 시를 창작해 주는 음유시인을 만났다. 그의 시는 운율 대신 코웃음 치게 하는 내용으로 절로 콧소리가 나게 하는 시였다. 하지만 좋은 직업인듯해 장래희망 리스트에 올려둔다.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우리는 테이트 모던 또한 빠짐없이 둘러본다. 지칠 때 즈음 도착한 10층 발코니에서는 테이트 모던 뷰 아파트라고 팔린 고가의 아파트 내부 인테리어와 더불어 템즈 강변을 내다볼 수 있었다.
대도시에 가면 아시안식을 먹어야 한다는 진심 어린 충고를 떠올리며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동양의 훈훈한 인심은 런던이라는 대도시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듯했다. 배부르게 대접받았다는 의미로 음식을 조금 남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건방진 육체는 남길 마음이 없다.
흑당버블티에 설탕 18스푼이 들어간다는 흉흉한 소리를 들은탓에 당을 50%로 낮춘 흑당 버블티를 맛본다. 별맛이 안 나는 게 당연하다. 관심 없다고 했던 레고 스토어, 엠 앤 엔즈 스토어 줄 서서 들어가, 전층을 활보한 후, 트라팔가 광장을 지난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런던아이와 타워브리지까지 다 돌고 나서야 집 생각이 든다.
숙소에 돌아온 시각은 새벽 1시, 시차를 계산하면 새벽 2시. 21시간 16분째 활동 중.
이틀 후, 테이트 모던의 10층 발코니에서는 6세 아이가 10층 테라스 난간 너머로 내던져져 5층 발코니에 떨어지는 끔찍한 범죄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