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폴리: 세계 3대 미항

단, 배를 타고 나폴리로 들어올 것

by Terry

설레는 크리스마스이브, 로맨틱한 파리 시내를 뒤로한 채 엄마, 아빠 나, 우리는 아침부터 이탈리아 나폴리로 떠날 준비로 바쁘다. 공항에서만난 산타옷을 입은 채 아이들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게, 사무적으로 주고 간, 다크 초콜릿만이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인 것을 상기시킨다.


나폴리에 공항에 도착한 나는 가이드북 저자가 나폴리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았는지, 왜 한국 사람들이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에 많이 가는지 그 답을 벌써 찾은 듯했다.


공항 입구 레스토랑에서 허기를 달래자며 둘러앉았다. ‘피자가 맛없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 번에 뒤집으며 새로운 사고를 열어준 나폴리 피자, 왜인지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불쾌할 정도로 차가운 시저 샐러드. 먹을수록 공허해져 간다.


공항 밖으로 한 발자국을 떼기 무섭게 한 아저씨가 곁으로 다가와 택시 요금을 제시했다. 고개를 들어 다른 옵션을 찾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에게 우리가 제시한 가격에 갈 거냐고 친히 물어봐주었고, 그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다. 멋진 의리다.


짐도 많은 터라 그가 데려간 곳에는 서있는, 택시는 아니었지만, 자동차에 올라탔다. 차가 한 대도 없는 휑한 거리를 지나고, 시내에 들어섰다. 어랏! 이 기분은, 서울에서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낸 이가 경기도 작은 위성도시로 이사 가는 길에 그 도시의 가장 번화한 거리를 처음으로 봤을 때의 그 기분이다. 창문 틈으로 차 안을 가득 채우는 따뜻한 바람과 함께 풍기는 매연 냄새에 취해간다.


좁은 골목을 돌다 기사는 서있는 행인에게 우리 숙소까지 가는 길을 묻는다. 그 사람은 우리 숙소 주인이었다. 어색하게 동행한 뒤, 차에서 내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영어가 서툰 주인이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솥뚜껑만한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마피아인가?


비좁고, 어두운 골목에 위치한 음침한 출입구에 비해 위층의 숙소는 강릉 해변가에서 산토리니 스타일이라며 꾸며놓은 펜션 같은 하얀 친근함이 있다.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냐는 질문에 '그렇다.'라는 대답을 받았다. 번역기를 돌리기 전까지 너무 활짝 웃으면서 말해서 아닌 줄 알았는데 그렇단다. 마피아인가?


크리스마스이브여서 굳게 잠겨있는 성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를 만났다. 나폴리는 어딘가 투박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물 한 병을 사보니 간간히 도둑놈들도 살고 있는 듯하다.

번화가도 둘러보는데 이미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이 보이고 사람들도 줄었다. 재활용품으로 만든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예산의존적인 트리, 성급하게 사버린 빨간 가디건, 곳곳에 보이는 소박한 디저트로 크리스마스를 느끼고 돌아왔다.


유럽에서의 5일째 밤이지만 생체리듬은 쉽게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엄마 아빠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고, 나는 내일이 폼페이 유적지가 개장하지 않는 일 년의 삼일(1/1, 5/1, 12/25)중 하루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 사건의 모든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었다.


시저 샐러드의 여파로 저녁을 먹지 않았고, 엄마 아빠는 곯아떨어져 있으므로(beauty sleep), 캐리어에서 진짬뽕 작은 컵을 꺼내먹었다. 부족해. 작은 테이블 위에는 티백들과 함께 언제부터 이곳에 놓여있을지 모르겠는 빵들이 놓여있었다. 그 빵들이 맛있을 확률은 기적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입으로 빵들을 초대한다. 거의 무맛에 가까운 빵에서 희미하게 나는 맛은 나의 미련함이었다. 강렬한 불닭 아몬드를 먹어치우고서야 더 먹을 생각이 사라진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겨울에 더운 나라를 여행하는 것의 단점이 보인다. 냉방시설은 최신식으로 구비되어있지만 난방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인데, 추위를 잘 타는 나는 이불속에서 웅크릴 대로 웅크려도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마지막으로 체한 게 십여 년 전 일이라 애꿎은 침구만 탓하고 있다 일어나 변기 옆 엉덩이를 위한 “세면대”를 붙잡고 앉았다. 헛구역질 두어 번에 댐이 무너지듯 구토가 쏟아져 나온다. 용이 불을 뿜어내듯 반작용에 얼굴이 뒤로 밀려난다. 잘 씹혀 조각조각 난 불닭아몬드는 콧구멍에, 목구멍에도 알알이 박힌다. 최악이다. 그날 밤의 시큼한 기억으로 남은 불닭아몬드는 그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했으며 불닭아몬드는 물론, 그 시리즈의 모든 아몬드는 아무리 다양한 맛으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해도 절대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간밤의 일의 심각성을 알 리 없는 엄마는 어젯밤 빵을 욱여넣는 나를 봤다며 핀잔을 준다. 함께 있지만 혼자라는 건 이런 것일까.

폼페이 유적지 대신 빌 게이츠도 휴가를 즐기러 온다는 신혼여행 명소 카프리를 가기로 했다.


진정으로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 나폴리 피자로 아침을 먹는 엄마 아빠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항구로 갔다.


아파서 못 가겠으니 둘이 다녀오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빠의 '에이, 우리끼리 어떻게 가냐'는 말은 ‘너는 너의 존재가치가 아닌 여행 안내자라는 도구로서 기능하여, 너의 개인적 아픔보다 여행이 더 중요하다.’로 확대해석되었고, 서러움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급한대로 근처 카페에 들어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더니 갖다 준 레몬맛 게토레이를 마시며 한 시간 넘게 남은 눈물을 짜내며 앉아있었다. 가게를 보는 치명적인 빨간색 트레이닝복을 반쯤 걸친 채로 활보하는 청년의 둔부를 보며 이것이 그의 섹스어필인지, 그렇다면 표적 집단은 누구인지까지 고민하다, 계속 그곳으로 시선을 빼앗기고마는 나를 확인할 정도로 평온함을 찾았다.


“카프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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